《력사적사실들을 바로 평가하여 우리의 새 세대들에게 옳은 인식을 주도록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고려-조선봉건왕조시기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기관으로서 집현전이 있었다.
집현전이란 이름은 1136년(고려 인종 14년)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으로 개칭한데서 처음으로 생겨났으며 13세기말-14세기초에 진현관을 두면서 페지된 일이 있었고 14세기 중엽에 두차례의 개편사업이 있었다. 집현전에는 문반들가운데서 학식과 재능이 있는자들이 겸임직으로 소속되여있었다.
여기에는 대학사, 학사(때로는 대제학, 제학이라고도 하였음) 등의 벼슬이 있었다. 학사(學士)들을 두고 강론을 하는것 외 조선봉건왕조초까지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조선봉건왕조 1420년(세종 2년)에 와서 이미 존재하던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여 겸직으로 령전사(정1품), 대제학(정2품), 제학(종2품), 부제학(정3품), 직제학(종3품), 직전(정4품), 응교(종4품), 교리(정5품), 부교리(종5품), 수찬(정6품), 부수찬(종6품), 박사(정7품), 저작(정8품), 정자(정9품) 등의 기구직제를 제정하여두면서 전임학사 10명을 두었던것을 1436년(세종 18년)에 전임학사를 20명으로 늘임으로써 기구가 확장되고 기능이 커졌다.
집현전에는 많은 도서를 구입하여 비치하였고 그 벼슬아치들로는 이른바 학문이 깊고 《덕행》이 있는자들이 뽑히였으며 그들은 왕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임무와 사관의 역할, 왕이 내릴 명령의 내용을 대신 짓거나 옛 제도와 유교학문의 연구 등의 일을 수행하면서 봉건통치에 필요한 책을 저술, 편찬하여 봉건통치를 학술적으로 안받침하였으며 국왕의 고문역할도 하였다.
15세기 전반기 이름있는 학자인 성삼문, 박팽년, 정린지, 신숙주, 최항, 강희안 등 집현전학자집단은 훈민정음창제에 적극 참가하였고 어학책인 《동국정운》, 고려시기 력사책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지리책인 《팔도지리지》, 농사관계책인 《농사직설》 등 각이한 분야의 책을 편찬출판하였으며 여러가지 천문관측기구를 만드는 사업도 진행하였다. 이리하여 집현전은 나라의 문화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왕이 된 후 집현전은 세조를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인물들이였던, 후세에 사륙신으로 이름을 남긴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결처로 되여있었기때문에 1456년에 페지되였다.
이렇듯 조선봉건왕시기의 집현전은 학문연구기관으로서 봉건국왕의 고문역할도 하였지만 그 존재를 마칠 때까지 나라의 문화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