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일제는 6.10만세시위투쟁의 교살자

 2016.11.2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군인들과 근로자들에게 미제국주의자들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 인민을 어떻게 학살하고 모욕하고 압박하였는가를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김일성전집》 제30권 247페지)

일제는 조선에서의 식민지통치 전기간 인류력사상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잔악무도한 파쑈적폭압으로 조선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다. 1926년 6.10만세시위투쟁은 일제야말로 조선인민에게 천추만대에 씻지 못할 야수적만행을 감행한 인간교살자라는것을 실증해주는 대표적사건이였다.

조선봉건왕조의 마지막왕이였던 순종의 사망과 그의 장례를 계기로 폭발한 6.10만세시위투쟁은 일제의 교활하고 악독한 식민지통치를 반대하고 민족적독립을 이룩하려는 조선인민의 대중적인 반일애국투쟁이였다. 광범한 청년학생들의 주동적이며 선봉적인 역할에 의해 힘차게 전개된 이 투쟁은 세계앞에 조선인민은 일제의 식민지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으며 기어이 나라의 독립을 달성하고야 말 민족의 의지를 뚜렷이 과시한 의의있는 투쟁이였다.

하지만 일제는 1920년대에 들어와 조선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해나서면서 겉으로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란스럽게 선전하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3.1운동못지 않는 조선인민의 6.10만세시위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6.10만세시위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한 일제의 죄행은 우선 시위장소에 저들의 방대한 폭압무력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여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을 무력으로 압살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한데서 여실히 나타났다.

일제는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거족적인 반일시위가 일어나는것이 두려워 인천에 기여든 4척의 순양함에 탄 해병들을 상륙시키는 한편 조선에 이미 주둔하고있던 군대와 경찰까지 총동원하여 시위진압을 위한 폭압망을 형성하였다. 결국 경성에는 조선주둔군사령관을 총대장으로 하는 경성주둔 일제침략군 전부와 평양, 함흥, 대구에 주둔하고있던 보병 1개중대, 라남 2사사단의 기병과 포병 1개소대, 경성 근위병 1개중대 도합 6 000명, 해군총대 1개대대의 700여명이 들어왔고 또 1만 2 000원의 폭압자금까지 투자되였다.

일제는 이 침략무력을 돈화문앞에서부터 봉도식장까지의 량측도로에 정렬시켜놓는 한편 봉도식(봉건사회에서 임금이 거동할 때 사람들이 가마나 말옆에 서서 목청을 돋구어 웨치게 하는 의식)장, 경성운동장내 경마장 등지에서 총포소리를 요란하게 울려 장례식참가자들에게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획책하였다. 당시의 삼엄한 형편에 대하여 《동아일보》는 《군대시위행렬》이라는 제목으로 《(6월) 10일 시내에는 룡산 조선군사령부에서 보병, 기병, 포병 등 약 5 000명을 출동시켜 시내 각 요소를 경계하고있었는데 림시사령본부는 기미년(1919년-인용자)운동이 발발하였던 종로<빠고다공원>에 두고 그안에는 (일본)군인들이 빼곡이 들어차있었으며 그 문밖에는 커다란 화물차 한대를 준비하고있었다. … (일본)군인들 10~20명씩 한무리를 이루어가지고 시내 각처로 돌아다니며 시위운동을 하였다.》고 폭로하였다.

일제는 또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을 통해 조선의 각 도로부터 50~200명의 응원무력을 경성에 올려오도록 하는 한편 경기도에서 700명을 더 보충하도록 하여 3 800여명의 경찰 및 헌병무력으로 삼엄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6.10만세시위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한 일제의 죄행은 또한 평화적시위에 참가한 조선인민에게 무차별적인 탄압을 감행한데서도 나타났다.

일제는 조선인민의 만세시위가 진행되기 바쁘게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과 인민들을 닥치는대로 검거투옥하였다. 두시간반사이에 종로경찰서에서 일제의 무차별적인 탄압으로 백수십여명의 학생들이 감금되였는데 그중에는 매를 몹시 맞아 머리에 선혈이 랑자한 학생도 있었고 또 이러한 부상자가 수백명에 달한다고 하면서 당시 출판물들은 일제의 폭압상을 적라라하게 폭로규탄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폭압만행으로 경성에서만도 하루사이에 200여명의 애국적청년학생들과 시위군중이 체포되였으며 평양, 원산 등 여러 지방들에까지 파급되여 전국적으로 1 0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투옥되였다.

일제는 체포한 시위참가자들에게 악랄한 고문을 들이대고 저들의 식민지악법에 걸어 1년이상의 징역을 언도하는 한편 이 사건으로 기소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경성제국대학입학자격을 박탈하고 각 관립, 사립학교당국에 무기정학, 유기정학 등의 처분을 내리도록 《명령》하였다.

6.10만세시위투쟁을 야수적으로 탄압한 일제의 죄행은 또한 6.10만세시위투쟁소식을 보도하는 애국적인 출판물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책동을 악랄하게 감행한데서도 나타났다.

일제는 시위참가자들의 애국적인 장거와 저들의 탄압만행을 광범히 보도한 출판물들이 《치안방해》의 기사를 실었다는 죄명을 씌워 《시대일보》, 《동아일보》의 6월 10일부와 《규슈일보》, 《오사까지지신보》, 《산요신문》, 《나가사끼신문》, 《미야자끼신문》, 《중국신보》 등 국외신문까지 모조리 압수하였다.

결국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만행으로 나라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애국적투쟁은 무참히 진압되고말았다.

모든 력사적사실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를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면서 《문화통치》의 식민지적성격을 비단보자기에 가리우려고 하는 일제야말로 저들의 침략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의 나라 민족의 정치적자주권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인간교살자, 불구대천의 원쑤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우리는 세월이 열백번 변하여도 일제의 침략적본성, 야수의 기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것을 명심하고 적들의 재침야망에 언제나 경각성을 높이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선군혁명령도따라 최후승리를 향하여 힘차게 싸워나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