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려의 애국명장 강감찬

 2023.2.27.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강감찬장군은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력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애국명장의 한사람입니다.》 (김정일전집》 제5권 266페지)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찌기 고려의 강감찬장군은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력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애국명장들중의 한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강감찬(948-1031)은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커다란 공적을 남긴 애국명장이다.


강감찬
사진. 애국명장 강감찬

강감찬장군은 948년 경기도 시흥군에서 개국공신인 강궁진의 아들로 태여났다.

력사기록에는 강감찬장군의 출생과 관련하여 신비화된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어느날 밤 지방으로 파견되여가던 고려왕의 사신이 시흥군을 지나게 되였는데 밤하늘의 큰 별이 어느한 민가에 떨어지는것을 보게 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신이 곧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였는데 마침 그 집 녀인이 사내애를 낳았다고 한다. 출생한 아이가 범상치 않다고 여긴 사신은 그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그가 바로 력사에 이름을 남긴 강감찬장군이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은 력사의 명인들을 존경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출생과 그 성장과정에 있었던 일들을 천지조화의 변화와 결부시켜서 많은 전설들을 창조하였다.

강감찬장군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도 그런 이야기들중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강감찬장군은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총명하며 지혜로워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례부시랑, 중추사, 한림학사 등의 문반직을 거쳐 거란의 3차침입당시에는 서북면행영도통사라는 높은 무반직에까지 오를수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찌기 강감찬장군에 대하여 평가하시면서 그는 문무를 겸비한 유능한 군사가, 정치가였다고 교시하시였다.

예로부터 출장입상이라는 말이 전해오고있는데 그것은 전장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된다는 말로서 강감찬장군과 같은 문무를 겸비한 나라의 기둥감들을 이르는 말이였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강감찬장군은 남달리 체소하고 용모도 보잘것 없었으며 옷차림도 수수하여 평시에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에 나서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결단성이 있었고 매사에 엄격하였다고 한다.

강감찬장군의 남달리 강한 애국심과 뛰여난 지략은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려인민들의 투쟁을 지휘하는 과정에 남김없이 발휘되였다.

강감찬은 1010년 11월 40만대군에 의한 거란의 2차침입당시 무능한 고려봉건통치배들의 투항주의적제기를 단호히 반대하고 력량을 재정비하여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주장을 실현시킴으로써 전쟁승리에 기여하였다.

거란의 2차침입을 물리친 후 서경류수로 있던 강감찬은 1018년 10월 거란의 새로운 침공에 대처하여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되였다. 그해 12월 거란은 고려에 대한 3차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상원수로 된 강감찬은 20만 8 300여명의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지휘부는 녕주(오늘의 평안남도 안주)에, 방어군의 기본주력은 녕주와 그 이북지대에 배치하고 적을 타격할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의 지휘밑에 고려의 기병 1만 2 000명은 압록강의 흥화진계선에서 미리 매복하였다가 적의 주력이 그곳으로 밀려들자 준비하였던 《소가죽제방》을 터쳐 적들을 일대 혼란속에 빠뜨린 다음 총공격으로 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첫 타격에서 심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장 소배압은 빨리 개경에 이르러 고려국왕을 항복시키겠다는 기도밑에 무모하게 계속 기여들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이러한 기도를 제때에 포착하고 부원수 강민첨으로 하여금 녕주에 대기시켜두었던 기동무력인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맹렬히 추격하면서 유리한 계선마다에서 놈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안기게 하는 한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는 1만명의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적을 앞질러 개경방어군에 합세하도록 하였으며 동북면병마사가 보낸 3 300명의 응원군도 개경방어에 가담하게 하였다. 또한 개경주변 100리안팎의 인민들을 성안에 옮기고 들판을 비우게 하였으며 우물을 메우고 짚이나 새초 같은것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리도록 하였다.

적들은 된타격을 받으면서 겨우 신은현(오늘의 황해북도 신계)까지는 기여들수 있었으나 그 사이에 당한 거듭되는 참패와 식량난, 음료수난 등으로 하여 더는 견디여낼수 없게 되였으며 드디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고려군은 강감찬장군의 전략적계획에 따라 총반격에로 넘어가 련주(오늘의 평안남도 개천)와 위주(오늘의 평안북도 녕변)계선에서 500여명의 적을 소탕하고 청천강계선으로 육박하였다.

고려군은 1019년 2월 대포위작전으로 거란군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준 구주전투를 벌리였다. 력사는 이 전투를 가리켜 《구주대첩》이라고 전해온다.

거란군은 제3차침입에서 전멸되다싶이 되였으며 10만가운데서 겨우 수천명만 살아돌아갔다고 한다.

구주등판에서 거란의 3차침입을 물리친 고려인민들의 투쟁은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입을 종식시키고 우리 인민의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주의정신을 과시하였을뿐 아니라 고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남긴 력사적인 사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