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나날에 생겨난 수많은 이야기들가운데는 다시 물고 온 감자값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사연인즉 이러하였다.
식량공작을 나갔던 두 대원은 적들의 경계가 하도 심하여 식량공작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였다.
1933년 4월 하순은 적들의 유격구에 대한 봉쇄책동으로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울 때였다.
유격대원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자기들을 애타게 기다리고있을 중대동무들한테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였기때문이였다. 생각끝에 그들은 가을한 감자밭에 들려 다문 언감자 몇알이라도 주어가기로 하고 어느한 감자밭에 찾아갔다.
아직도 녹지 않은 언땅을 뚜지며 언감자알을 찾던 그들은 밭 한모퉁이에서 우연히 감자움을 발견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묻었던 감자를 날라간 흔적은 있었으나 아직도 감자는 퍼그나 있었다.
두 대원은 감자임자를 찾으려 하였으나 막연하게만 생각되여 감자를 한짐씩 걸머지고 유격구로 돌아왔던것이다.
그러시면서 우리는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할 때 어느 한순간도 인민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유격대의 명칭속에 《인민》이라는 고귀한 두 글자를 반영한것이며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는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혁명적구호를 내건것이라고, 우리는 비록 굶어죽고 얼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인민들의 재산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고, 이것은 인민의 아들딸들로 구성되여있고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싸우는 우리 군대의 철칙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두 대원은 간난신고하여 겨우 찾은 감자주인에게 자기들의 잘못을 사죄하고 감자값을 내놓았다.
감자주인은 펄쩍 뛰며 자기도 농민협회성원인데 유격대원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감자값을 받다니 어디 될말인가고 하면서 굳이 감자값을 되돌려주었다.
그러는 그에게 두 대원은 감자값을 밀어맡기며 말하였다.
《이것은
인민의 아들딸들로 조직되고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손에 무장을 들고나선 유격대원들에게 있어서 인민의 리익보다 더 귀중한것은 없었다.
인민은 자기의 리익을 지켜주는 유격대를 친자식으로 여기고 그들을 물심량면으로 적극 지지성원하고있다.
그런것으로 하여 유격대와 인민의 관계는 바로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 살수 없는 관계로 되는것이다.
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