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는 귀중한 문화유적들이 많습니다. 이 유적들에 대하여도 쓰는것이 필요합니다.》 (
우리 인민의 뛰여난 슬기와 재능, 발전된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들가운데는 가야의 기마인물형명기도 있다.
명기는 봉건사회에서 장례를 지낼 때 매장용으로 따로 만들어 주검과 함께 묻는 물건이다.
가야의 명기에는 집, 오리, 거부기, 목에 보요를 단 산양, 소뿔, 배, 신, 달구지, 말 등을 형상한것들이 있다. 그중에는 가야의 군사력을 보여주는 기마인물형명기도 있다.
가야지역에서 기마인물형명기는 2개가 알려졌다.
김해 덕산리에서 알려진 기마인물형명기는 관모(절풍같은 모자)를 쓰고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무사가 쇠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앉아있는 모습이 형상되여있다.
또한 말잔등으로부터 말궁둥이사이에는 두개의 소뿔모양잔이 솟아있고 말의 네다리는 판대기우에 힘있게 뻗쳐있으며 그 아래에 구멍이 뚫린 받침대가 있다.
또 하나의 기마인물형명기는 김해 덕산리에서 나온것과 비슷하지만 받침대에 난 구멍이 얼마간 차이나고 말의 형상이 조금 다를뿐이다.
이처럼 기마인물형명기는 개마무사의 모습을 매우 실감있게 형상한것으로서 당시 가야에 개마장비로 무장한 기병이 존재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그러면 가야의 개마장비는 언제 어떻게 생겨나게 되였는가.
가야의 개마장비는 고구려의 영향에 의하여 생겨났다고 볼수 있다.
기마인물형명기를 통하여 본 가야의 개마장비는 고구려무덤벽화의 개마무사그림들에서 흔히 보이는것과 매우 비슷하다.
개마무사가 그려진 고구려무덤벽화들은 고국원왕무덤, 마선구1호무덤, 통구12호무덤, 약수리벽화무덤, 세칸무덤, 덕흥리벽화무덤, 개마무덤 등이다.
이 무덤들가운데서 고국원왕무덤이 4세기중엽에 쓰인것으로써 제일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려진 개마장비는 이미 완성된 모습이므로 고구려에서 개마장비가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그보다 더 이른 시기라고 볼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246년 동천왕이 위나라 관구검과의 싸움에 5 000여명의 철기를 동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개마장비는 3세기경에 출현하였다.
이런 우수한 개마장비는 고구려의 조선반도남부지역에 대한 국토통합정책이 적극화되면서 가야지역에 전파되였다고 볼수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고구려가 경자년(400년)에 보병과 기병으로 무어진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고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오늘의 김해지방)까지 진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5세기초 고구려의 조선반도남부지역에 대한 진출과 오늘의 김해, 부산일대에 대한 일정한 기간의 주둔은 가야가 고구려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는데서 중요한 계기점으로 되였다.
가야지역의 부산 복천동10호, 35호, 36호, 학소대 1구 3호, 합천 옥전M1호, M3호, 23호, 28호무덤, 김해 대성동11호무덤, 함안 마갑총 등에서 실전용의 말갑옷들과 마면갑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개마장비들이 나오는 무덤들은 모두 5세기중엽부터 쓰인것들이다.
물론 가야의 5세기이전의 무덤들에서 마구류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개마장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야지역에서 나온 기마인물형명기를 통하여 가야는 고구려문화의 영향에 의하여 5세기초이후부터 개마장비들을 만들어 리용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