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당대의 걸작으로 송나라에 알려진 《례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2021.5.2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선조들은 그림을 아주 잘 그렸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가운데는 걸작이 많습니다.》 (김정일전집》 제4권 391페지)

《례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는 고려시기 우리 나라의 높은 회화발전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경화작품이였다.

고려시기 우리 선조들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미술작품들을 창조하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을 내외에 널리 떨치고 인류문화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국토통일이 실현되고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외래침략자들의 거듭되는 침략을 물리쳤으며 나라의 대외적지위가 훨씬 높아진것은 고려에서 회화가 발전할수 있었던 중요한 사회력사적전제로 되였다.

또한 경제와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여 종이와 천, 색감과 붓, 먹 등 문방구들이 매우 높은 질적수준에서 대량적으로 생산된것은 고려의 회화발전을 직접적으로 추동한 물질적담보로 되였다.

고려시기의 회화는 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에 의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이시기 인민들은 민족의 단일성을 뚜렷이 하면서도 시대의 지향을 반영하여 인간생활과 정서를 진실하고 생동하게 보여주는 회화작품을 창작할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많은 창작가들로 하여금 화단에로의 진출과 창작활동을 자극하였으며 이에 따라 높은 창작적능력을 소유한 화가들이 배출되고 그들에 의하여 인물화, 자연화 등 민족적특성이 뚜렷한 우수한 회화작품들이 창작되였다.

한편 봉건국가에서는 왕궁안에 도화원을 설치하고 직업적인 전문화가들을 배치하여 통치배들의 정신문화적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도화원의 화가들은 그속에서도 민족적회화의 우수한 전통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적극 노력한 결과 인민적이며 진보적인 그림들을 창작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12세기 리녕이 그린 《례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는 당대의 걸작으로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진 유명한 회화작품들이였다.

리녕은 전주사람으로서 고려의 회화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을뿐아니라 주변나라의 회화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이름난 화가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에 남다른 취미와 재능을 가지고있었으며 당시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이 높았던 리준이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그후 리녕은 인종집권시기(1123-1146년)에 도화원의 화원이 되였으며 의종집권시기(1147-1170년)에는 궁중의 그림과 관련한 일을 모두 주관하는 지위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리녕은 《례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등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그대로 생동하게 형상한 풍경화를 특출하게 잘 그려 명성을 떨치게 되였다.

리녕이 풍경화를 얼마나 잘 그렸는가 하는것은 다음의 하나의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어느날 리녕이 그린 산수화를 보고 탄복해마지 않던 국왕은 당시 화단의 대가로 자처하던 리준이를 불러 그 그림을 보여주었다.

리준이는 그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이 그림이 만약 타국에 있다면 나는 천금을 주고도 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리준이는 원래 후배를 시기하여 그림을 잘 그리는자가 있어도 칭찬하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그 그림이 하도 생동하고 필치가 훌륭한것으로 하여 이렇게 말하였던것이다.

《례성강도》는 리녕이 사신단의 한 성원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그 나라 국왕 휘종의 요청에 의하여 창작한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고려와 경제문화교류를 활발히 진행하던 송나라에서는 1124년 7월 추밀원 부사 리자덕을 따라온 사신단성원들중에 유명한 화가 리녕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래서 송나라 국왕 휘종은 리녕을 만나 그의 그림솜씨를 알아보려고 그림을 그려줄것을 부탁하였다. 이때 리녕은 《례성강도》를 그렸다고 한다.바치였다. 그것을 본 휘종은 거듭 감탄하면서 리녕의 독특한 화법을 자기 나라에 도입하기 위하여 회화에 조예가 깊고 또 회화관계일을 맡아보는 한림대조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 등에게 명령하여 리녕에게서 그림그리는 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리녕의 화법이 송나라에 전수되게 되였으며 그의 명성은 송나라에도 크게 떨치게 되였다.

《례성강도》는 현존하지 않지만 고려의 수도주변을 감돌아흐르는 례성강의 풍치수려한 절승경개와 외국배들의 돛대가 숲을 이루고있던 벽란도 등이 생동하게 그려졌다고 보아진다.

《천수사남문도》 역시 리녕이 그린 그림으로써 송나라 사람들속에서 매우 희귀하고 값비싼 물건으로 간주되던 회화작품이였다.

송나라 상인들은 고려와의 대외무역을 진행하면서 국왕의 환심을 사서 경제적리득을 보기 위해 희귀한 물건들을 가져다 바치군 하였는데 어느 한 상인은 인종왕에게 《천수사남문도》를 례물로 바쳤다. 그것을 받아본 인종왕은 《중화의 기이한 물건이로다.》라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고 자랑삼아 그것을 리녕에게 보이였다. 리녕이 그림을 보고 왕에게 말하기를 《이 그림은 제가 그린 그림이올시다.》라고 하였으나 왕이 도저히 믿지 않으므로 그림의 배접한 뒤를 뜯어보이였다. 거기에는 과연 리녕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천수사남문도》에 대하여 1260년에 간행된 리인로의 《파한집》에서는 개경 동문밖에 천수사라는 절간이 있었는데 성문에서 100여보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절뒤에 푸른산이 줄지어있고 앞에는 넓은 시내물이 흐르며 길 량편에는 수백그루의 나무가 늘어서서 록음을 이루어 강남으로부터 수도로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쉬군 하였다. 그리하여 수레바퀴소리, 말발굽소리 요란하고 어부의 노래, 나무군의 피리소리가 그칠사이 없었다. 그리고 안개사이로 붉고 푸른 단청의 루각들이 반쯤 솟아있는데 손님들이 아름답게 단장한 녀인들을 데리고 풍류군을 끌고와서 절문에서 묵으면서 사람들을 맞고 보냈다. 옛날 인종왕때 궁중의 화국 리녕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 가운데서도 산수를 가장 잘 그리였다. 그는 송나라 상인에게 그림을 준 일이 있었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흘러 왕이 송나라 상인에게 이름난 그림을 부탁하여 상인이 그 그림을 바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그것을 보였더니 리녕이 나서서 말하기를 《이 그림은 제가 그린 천수사남문도입니다.》하고서 그 그림의 뒤면을 돌려보이였다. 거기에는 그가 단 화제가 상세히 기록되여있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천하의 이름있는 화가로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고 전하고있다.

비록 《례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는 실물로 전해지지 않고있지만 그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당시 화단에서 으뜸가는 재능을 가지고있던 리녕이 송나라에 가서 조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줌으로써 애국적이며 사실주의적인 풍경화창작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것을 잘 알수 있게 한다.

고려의 화가 리녕이 그린 《례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가 외국에서까지 당대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된것은 조선민족의 자랑으로 될뿐아니라 조선화의 화법이 얼마나 우수하고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었는가를 다시금 실증해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