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박문은 조선을 완전히 저들의 손에 넣을 목적으로 로일전쟁에서 패한 짜리로씨야와 회담하려고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할빈역에 기여들었다가 애국렬사 안중근의 권총세례를 받고 황천객이 되였습니다.》 (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할빈역에서는 당시 일본추밀원 의장이였던 이또 히로부미를 《환영》하는 의식이 있었다.
로씨야군악대가 군악을 울리고 여기저기서 폭죽이 튀는 소리와 함께 군중들속에서 환호성이 터져오르며 역구내가 설레였다. 로씨야군 의장대를 사열한 다음 만족한듯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일본거류민들쪽으로 다가오던 늙은 난쟁이의 안면이 갑자기 굳어졌다. 두손으로 권총을 모두어잡고 면바로 자기를 겨누고 서있는 사나이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친것이였다. 숨막히는 순간, 4~5m도 안되는 거리에서 30살의 조선청년 안중근이 쏜 세발의 탄알이 련거퍼 이또의 외투를 뚫고들어갔다. 이또는 썩은 나무등걸처럼 꼬꾸라졌다.
이또가 쓰러지는것을 확인한 안중근은 나머지 탄알로 키작은 왜놈만 골라쏘았다. 궁내부대신 비서관 모리야스 지로와 대련항에서부터 이또를 영접해온 할빈주재일본총령사, 만철총재 등이 차례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총소리와 비명소리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군중들로 하여 행사판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였다.
말할수 없는 통쾌감에 사로잡힌 안중근은 피할 생각은 조금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삼창하였다. 주위에 로씨야군중이 많았으므로 로어로 《까레야 우라(조선 만세)!》라고 웨치기도 하였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로씨야병사들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안중근은 당황한 기색없이 포박하라고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사이 이또는 렬차칸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시시각각 숨이 꺼져갔다.
첫 탄알은 이또의 오른쪽 웃팔가운데로 들어가 륵골사이를 빠져 왼쪽페에 박혀있었고 두번째 탄알은 오른쪽 팔굽관절을 뚫고 륵골사이를 빠져 흉복부를 헤쳐놓은 다음 왼쪽 륵골밑에 박혔으며 세번째 탄알은 오른쪽 륵골옆으로 들어가 복부를 찌르고 좌복직근에 배겨있었다. 그중의 어느 하나라도 목숨을 끊어버리기에는 충분하였다. 상처를 동여맨 붕대는 삽시에 피로 질벅해졌다.
간신히 입을 벌린 이또는 누가 쐈는가고 물었다. 조선사람이라는 대답을 들은 이또는 《난 이젠 가망이 없다.》는 하고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가는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감아버렸고 다시는 뜨지 못하였다. 저격당하여 약 30분이 지난 후였다.
이또 히로부미는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을 앞장에서 집행한 장본인이였다.
욕심스럽게 남의 나라 땅을 넘보며 싸다니던 68살의 이또 히로부미는 이렇게 1909년 10월 26일 10시에 객사하였다. 속담에 재미보는 골에 범난다는 말이 있다. 자기를 저격한것이 조선사람이라는것을 알고 이젠 가망이 없다고 한것은 조선민족앞에 지은 죄를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있었기때문일것이다.
열혈청년 안중근렬사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처단한것은 일제침략자를 복수한 하나의 애국적장거였다. 해주태생인 안중근은 애국심이 강하고 일제에 대한 증오심이 높았으며 기울어져가는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한목숨 서슴없이 바칠 각오를 가진 강의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체포될 당시 안중근의 몸에서는 권총외에 단도가 발견되였는데 심문에서 《성공하면 그 자리에서 자살하려고 하였는가?》하고 묻자 안중근은 《조선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서는 이또만 죽여가지고는 안되므로 아직 죽지 못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개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하면서 조선에서 반일애국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우덕순, 조도선, 류동하, 정대호, 김구, 안창호, 김창걸, 리갑, 리동휘, 류동열 등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였다. 안중근의 활동거점이였던 남포, 룡강일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였다.
11월 3일 대련관구 려순형무소 제3호동 9호실에 수감된 안중근은 《인내》라는 두 글자를 벽에 써놓고 일제교형리들의 악행을 이겨나갔다.
안중근은 자신을 조선의병군 참모장이라고 밝히면서 자신은 자객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이또를 처단한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면서 이또 히로부미에 대한 15개 항목의 고소장을 만들어 제출하였다.
1910년 2월 12일까지 5회에 걸쳐 진행된 일제의 《공판》은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그러나 법정을 일제의 조선침략을 단죄하는 성토장으로 만든 안중근은 침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사람 한명을 죽이면 열명, 열명을 죽이면 백명, 백명을 죽이면 천명의 의병들이 일떠설것이다. … 한해에 안되면 백번 싸워서라도, 래년에 안되면 한세기후에라도, 자식대에 안되면 손자대에까지 싸워서라도 반드시 조국을 독립시키고야말것이다. … 2천만 조선인민이 다 죽지 않는 한 절대로 조선은 빼앗지 못할것이다. … 마지막 한명의 조선사람이 나라를 구원할수도 있을것이다. 그것이 바로 조선민족의 기질이다!》
죽음이 배회하고있었지만 안중근은 평온한 마음으로 감옥안에서 92일동안 자서전인 《안응칠력사》를 썼으며 일제를 평화의 교란자로 규탄한 《동양평화론》도 집필하였다.
한문서예에도 뛰여났던 그는 힘있으면서도 부드럽고 웅건하면서도 조화미가 째인 글들을 남겼다. 그중에는 《겨울이 와야 소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사나이 죽는대도 마음은 강철같고 의사의 마음은 위험앞에서도 구름같다.》, 《평화가 도래하지 아니함은 통탄할 일이요, 침략정책 버리지 아니함은 가련한 일이로다.》 등이 있었다. 안중근은 큰 붓으로 휘갈겨 쓴 글곁에 작은 붓으로 언제 어디서 누가 썼다는것을 밝힌 다음 왼쪽손바닥을 펴서 먹을 듬뿍 묻힌 다음 손바닥도장을 찍군 하였다. 그 손바닥도장에는 약손가락 마지막마디가 늘 찍히지 않았는데 그것은 1909년 1월 조선독립혈서를 쓸 때 잘라버렸기때문이였다. 그 유표한 흔적이 오히려 안중근의 자필임을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일제는 이또가 숨통이 끊어진지 꼭 다섯달이 되는 날자와 시간에 맞추어 안중근을 사형하기로 하였다. 안중근은 왜놈들의 좀스러운 속통에 가소로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3월 24일 멀리 남포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온 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것이니 두려움은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할빈공원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모두에게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조선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이다.》
안중근은 비통한 감정으로 흐느끼는 동생들을 건너다보다가 와락 손을 깨물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그들이 가져온 흰 명주천에 《제일강산》이라는 글을 남겼다.
1910년 3월 26일 10시, 안중근은 흰 조선옷차림으로 사형장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을 우러러 《조선독립 만세!》라고 조용히 웨친 그는 시를 읊었다.
장부의 몸 죽는대도
철석같은 마음 변함있으랴
의사는 비록 사형장으로 나가건만
애국의 기상 굽힘 있으랴
31살의 안중근렬사는 이렇게 교수대에 올랐다. (조국이 해방된 후 안중근의 유해를 발굴하기 위한 현지답사를 품들여하였으나 일제교형리들이 어떻게 은밀히 처리했는지 종시 렬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였다.)
조중인민은 안중근을 《동양의 의사》로 높이 찬양하였다. 의병장 류린석은 《세계각국에 크게 고하노라》라는 글을 써서 안중근을 《고금에 무쌍하다》고 칭찬하면서 2천만 조선사람이 모두 안중근이니 일제를 물리치고 승리할 날은 반드시 올것이라고 부르짖었다. 일찌기 중국에 망명하여 문장으로 조선의 정신을 전파한 시인 김택영은 《의병장 안중근이 나라의 원쑤를 갚았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시를 써서 《마치 양새끼 찔러죽이듯 나라의 원쑤놈 통쾌하게 죽였다.》라고 끓어오르는 격정을 터뜨렸으며 도서 《안중근전》을 집필하여 1만여부를 전중국땅에 배포하였다. 신채호와 더불어 근대조선사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박은식도 1914년 《안중근전》을 편찬하였다.
중국부르죠아계몽운동가의 한사람이였던 량계초(1873-1929)도 시 《추풍에 넝쿨 끊어지도다》(1909)에서 《할빈의 총소리는 세계를 진감시킨다》라고 하면서 안중근의 장거를 《동양평화의 암》을 제거한 장거로 높이 찬양하였으며 북양군벌의 우두머리로서 후에는 《대총통》이 되였던 원세개까지도 안의사의 의거를 칭송하는 시를 지었다. 조선사람이 중국사람의 원쑤를 갚아주었다는것이 당시 중국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이였다. 특히 만주에 사는 사람치고 안중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할빈역에 안렬사의 동상을 세우자는 사람까지 있었다.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때로부터 105년이 되여오던 2014년초 중국 흑룡강성 할빈역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세워졌다.
안중근은 희생적으로 투쟁하였으나 탁월한
나라의 독립을 몇몇 원쑤들을 죽이는 방법으로 이룩할수는 없다.
그러나 렬사의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원쑤에 대한 불타는 증오로 높뛰던 생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지정학적위치는 변함이 없지만 렬강들의 각축전마당으로 무참히 짓밟히던 어제날의 약소국이 대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