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유적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유산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의 재부입니다.》
창녕 교동무덤떼는 조선반도의 남부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우리 나라 중세초기 봉건국가의 하나였던 가야의 유적이다.
이 무덤떼는 가야의 력사와 문화발전수준과 함께 가야문화발전에 준 동방강국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랜 력사책의 하나인 《삼국유사》에서는 창녕군을 비화가야가 있던 곳으로 전하고있는데 여기에는 많은 무덤들이 있다.
교동무덤떼는 창녕읍의 북쪽 목마산언덕우에 분포되여있는데 그중에는 돌곽흙무덤들도 있다.
4호무덤은 발굴당시 무덤무지가 허물어져서 일정한 크기로 가공한 돌로 축조한 돌곽과 무덤무지주위에 쌓았던 돌시설만 남아있었다.
돌곽의 크기는 길이 5m, 너비 1.1m, 높이 1.7m이며 천정은 길이 2.1~2.3m, 너비 0.5~0.8m되는 길죽한 판돌 9개를 덮은 평천정형식이였다. 무덤무지주위에 쌓았던 돌시설은 직경 20~40cm정도 되는 돌들을 2~3단으로 쌓아올린것인데 그 남북길이는 12m이고 동서길이는 11m였다.
5호무덤도 역시 심히 파괴되였기때문에 무덤무지와 그 주위에 쌓았던 돌시설에 대해서는 알수 없고 다만 돌곽과 천정의 일부만이 남아있었다. 돌곽의 크기는 길이 6.2m, 너비 1.6m, 깊이 1.8m로서 비교적 큰것에 속한다. 천정은 길이 2.6m, 너비 0.7m, 두께 0.5m정도 되는 돌로 덮은 평천정이였는데 발굴당시에는 5장만이 남아있었다.
교동무덤떼에서는 돌칸흙무덤도 나왔는데 대표적인것은 3호무덤이다. 이 무덤은 무덤떼에서 전망이 좋은 가장 높은 곳에 있고 무덤무지의 직경이 25m정도 되여 대형무덤에 속한다.
이 무덤의 구조는 무덤길과 주검칸이 있는 외칸짜리 돌칸흙무덤형식이다.
주검칸은 중심에 놓인 나무곽주위에 일정한 크기로 가공한 돌들을 축조하여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길이 7.2m, 너비 1.3m, 높이 2.2m정도이며 천정은 길이 2.44m, 너비 0.9m되는 판돌 9장을 주검칸에 수평되게 덮은 평천정형식이다.
창녕 교동무덤떼의 여러 무덤들에서는 활촉, 창끝, 고리자루긴칼, 투구, 갑옷 등 무기무장과 마구류, 꺾쇠를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이 무덤떼의 무덤들에서 주목되는것은 무덤내부구조에서 나무곽주위에 돌곽이나 돌칸이 새로 생겨난것이다.
가야지역에서는 4세기 중엽이전까지 움무덤, 나무관무덤, 나무곽무덤, 독무덤, 돌관무덤 등의 무덤들이 쓰이였다.
그런데 4세기중엽 이후부터는 나무곽주위에 돌을 쌓아 돌곽이나 돌칸을 만드는 새로운 무덤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나무곽주위에 돌곽이나 돌칸을 만드는 형식은 4세기 중엽이후부터 가야령역에 처음으로 생겨났는데 고구려문화의 영향과 결부시킬수 있다.
B.C. 277년에 성립된 고구려에서는 처음부터 돌로 무덤을 축조하였으며 돌각담무덤으로부터 돌칸흙무덤으로 변천되였다.
4세기중엽 동족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한 고구려의 남방진출이 적극화되면서 고구려의 우수한 문화가 가야지역에도 전파되여갔으며 그 과정에 가야의 무덤들에도 나무곽주위에 돌곽이나 돌칸을 만드는 새로운 무덤형식이 생겨나게 되였던것이다.
창녕 교동무덤떼에서 돌곽흙무덤이나 돌칸흙무덤이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는것은 일부 무덤들에서 꺾쇠가 발견되는것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돌곽흙무덤인 3호, 4호무덤에서는 껴묻거리와 함께 꺾쇠가 새로 발견되였는데 이것은 4세기 중엽이전의 무덤들에서 볼수 없는 유물이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벌써 4세기 이전의 무덤들에서 꺾쇠가 흔히 발견되고있다.
물론 백제령역에서도 3~4세기에 해당하는 가락동 2호무덤, 석촌동 4호무덤, 충주돌각담무덤 등에서 꺾쇠가 알려졌지만 이 무덤들도 고구려돌각담무덤의 영향을 받았다는것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창녕 교동무덤떼의 3호, 4호무덤 등에서 새롭게 꺾쇠가 발견된 현상도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좋은 실례로 되는것이다.
창녕 교동무덤떼의 고구려적성격은 무덤들에서 발견된 유물들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교동무덤떼에서 알려진 유물들가운데서 가장 많은것은 활촉, 창끝, 고리자루긴칼, 투구, 갑옷 등과 같은 무기무장이다. 특히 교동무덤떼의 89호무덤에서는 뱀대가리모양활촉, 버들잎모양활촉, 목긴활촉, 창끝 등 무기들이 알려졌다.
뱀대가리모양활촉, 버들잎모양활촉, 목긴활촉들은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사용된 활촉들이며 창끝 역시 고구려의 정릉사터와 판분령유적에서 알려진 창끝과 같다.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사용하였던 무기류들이 가야의 창녕 교동무덤떼에서 대량적으로 발견된것은 고구려의 무기들이 직접 가야령역에서 침투되여 널리 사용된 결과라고 볼수 있다.
이밖에도 11호무덤에서 나온 고리자루긴칼, 금도금한 마구류, 동으로 만든 바리, 89호무덤에서 나온 행엽 등도 고구려의 만보정 242호무덤, 집안 우산무덤떼, 평성시 지경동1호무덤 등에서 알려진것과 같다.
가야의 창녕 교동무덤떼가 고구려적성격이 강한것은 이 지역에 고구려군사들이 상주한 결과이라고 볼수 있다.
고구려는 4~5세기 삼국통일정책을 적극 추진시키면서 신라수도를 비롯한 주요요충지들마다에 주둔하면서 백제와 가야, 왜의 련합세력으로부터 신라를 보호하여주었다. 창녕지역은 당시 고구려가 가야로부터 탈환하여 신라에 편입시켜주고 군대를 주둔하여 지켜준 주요지역중의 하나라고 볼수 있다.
이와 같이 창녕 교동무덤떼는 우리 나라 중세초기 봉건국가 가야의 무덤변천과정과 가야문화발전에 준 고구려의 영향, 4~5세기 고구려의 적극적인 국토통합과정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