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려시기의 단군사터

 2019.11.1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적으로 내려오는 민족유산을 옳게 살리는것과 함께 민족의 새로운 우수성을 끊임없이 창조해나가야 한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9권 140페지)

단군사터는 개성시 송악산마루에 있는 고려시기의 사당터이다.

광명천상류쪽에서 송악산으로 올려뻗은 오솔길을 따라 산마루에 오르면 덩지 큰 원통형바위가 곧바로 서있는것이 보인다.

웃면은 거울처럼 반반하며 직경이 약 9m 되는데 마치 북과 같이 생겼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북바위라고 불리워졌다.

단군사터는 바로 이 북바위옆에 있다.

단군사는 고조선의 시조 단군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였다.

우리 선조들은 벌써 B. C 3천년전에 나라(고조선)를 세우고 동방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문명시대에 들어섰다.

고조선은 민족의 시조 단군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민족사에서의 첫 노예소유자국가였다. 고조선이 성립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노예소유자사회의 력사가 시작되고 우리 인민은 당당히 국가시대의 력사를 개척해나가게 되였다.

지난 시기 단군은 신화적인물로 간주되고 단군조선의 력사는 전설로만 취급되여왔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주체82(1993)년에 단군이 실재한 인물로 확인됨으로써 오랜 세월 잊혀지고 파묻혔던 민족의 시조를 찾아내고 반만년의 력사를 되찾게 되였다.

개성시에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단군관계의 유적을 발굴조사할데 대하여 주신 가르치심을 관철하는 과정에 주체88(1999)년 단군사당터와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의 어머니사당터를 찾게 되였다. 단군사의 건립년대는 자세하지 않으나 고려전기에 세워졌다고 인정된다. 단군은 고조선시기는 물론 고구려를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력대 국가들에서 《하늘이 낸 임금》, 하늘의 아들로 신성화되였으며 그를 숭배하는것은 하나의 법도로 되여있었다.

고려시기 단군관계기록은 《삼국유사》(13세기 일연)를 비롯하여 《삼국사기》(1145년 김부식), 《제왕운기》(1287년 리승휴), 《삼한시귀감》(14세기 조운흘)등 여러 문헌들에 있는데 이것은 그 어느 시기보다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았던 당시 형편에서 인민들을 애국정신으로 각성시키는데 단군신앙이 필요하였던 사정을 고려한것과 관련된다. 이로부터 고려통치자들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곳에 단군사당을 지어놓고 단군신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라의 안전과 부흥을 도모하려 하였다.

송악산 단군사당은 바로 당시의 그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세워졌다. 13세기 일시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놓고 하늘에 단군제를 지냈는데 이것은 수도 개경의 송악산 단군사의 전례를 그대로 옮긴것이라고 볼수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화도에 송악산, 고려산, 승천포 등 고장이름이 씌여있는데 이것은 강화도 천도시에 개경의 지명들이 그대로 옮겨진것이다.

1124년에 편찬된 《고려도경》에 의하면 당시 고려에서는 외국사신들이 오면 송악산사와 류화사당(동신사)를 참관시키고 제사지내는것을 하나의 국가적의식으로 진행하였다고 기록되여있다.

전설에 의하면 송악산사는 신령스러운 사당으로 알려졌는데 11세기 거란침략자들이 수도 개경 가까이 침입하였을 때 송악산사의 신이 조화를 부려 부근의 수만그루 소나무를 사람으로 변화시켜 말소리를 내게 하니 적들은 고려군사들이 제놈들을 포위하려 오는줄 알고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사당을 짓고 그 신을 제사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단군사는 일제강점초기 놈들의 단군말살정책으로 탄압당해오다가 개성지방 인민들의 투쟁에 의해 1920년대 전반기에 보수되고 단청도 새로 하였는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침략자들이 이곳에 진지를 만들면서 완전히 파괴되여 지금은 주추돌 몇개와 기와쪼각들이 남아있다.

단군사터는 고조선 및 단군관계의 력사를 연구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오늘도 단군사터는 우리 인민들에게 애국주의정신을 키워주는 귀중한 력사유적으로서 잘 보존관리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