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진주대첩과 김시민

 2017.6.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침략자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조국을 보위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한사람같이 일어나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쳤으며 조국을 영웅적으로 방위하면서 반만년의 슬기로운 력사를 창조하였습니다.》 (김일성전집》 제1권 551페지)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워온 자랑찬 력사를 가지고있다.

임진조국전쟁시기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진주에서의 대승리)은 우리 인민들이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얼마나 용감하고 희생적으로 싸웠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진주대첩은 임진조국전쟁의 첫 시기인 1592년 10월 초순에 진주성방위자들이 3만명에 달하는 일본침략군의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련속 물리치고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면서 진주성을 끝까지 지켜낸 대표적인 전투이다.

진주는 당시 경상우도의 행정군사적중심지의 하나로서 행정적으로는 목, 군사적으로는 주진으로서 병마절도사가 배치되여있었다. 진주는 또한 진주평야를 끼고있어 물산이 풍부하고 륙로로 경상좌우도와 전라도 남원으로 통하는 요충지대였으며 수로로 남강을 통하여 락동강과 부산으로 통하는데 편리하여 군사전략적의의가 매우 큰 지역이였다.

경주를 비롯하여 경상도의 도처에서 타격을 받은 왜놈들은 기울어져가는 전쟁국면을 돌려세우려고 하세가와의 지휘밑에 있던 부산, 동래, 김해의 강점군을 기본으로 하고 경상도에 있던 적의 대부분의 병력과 본국에서 새로 보충받은 무력까지 합하여 3만의 대군을 편성하고 일부 수군까지 합세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적들이 진주성공격에 막대한 무력을 들이민것은 진주를 강점하고 나아가서 전라도로 침공하여 조선수군을 무너뜨림으로써 저들의 《수륙병진》작전을 실현하며 당면하게는 어렵게 된 군량문제를 풀고 졸병들의 사기를 높이려는데 있었다.

당시 진주에는 둘레가 4 359자(약 1 300m)인 촉석산성에 3 000여명의 관군과 얼마 안되는 의병들, 인민들이 있었다. 이것은 적들의 대규모적인 침략무력에 대비해볼 때 너무도 보잘것없는 무력이였다.

그러나 진주성의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은 김시민(1554~1592)의 지휘밑에 3만대적의 발악적인 공격을 련속 물리치고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줌으로써 진주대첩을 이룩하였다.

김시민은 경상도 안동출신으로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1591년에 경상도 진주판관으로 임명되였으며 임진조국전쟁초기 여러번 왜적을 격퇴한 공로로 진주목사로 승급되였다.

김시민은 우선 적의 침략에 대처할 만단의 전투동원준비를 사전에 빈틈없이 갖추도록 하였다. 근 10배에 달하는 왜적의 대규모무력을 상대로 하여 싸워야 하는만큼 그 준비를 얼마나 빈틈없이 하는가 하는것은 전투의 승패와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김시민은 성안의 군사와 인민들을 동원하여 성벽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와 무장을 갖추고 군량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화약을 제조하고 170여정의 조총과 현자총통, 질려포, 진천뢰를 비롯한 화포 등 많은 무기를 확보하였으며 군량도 충분히 저축하였다.

김시민은 이와 함께 불놓는 기구들을 미리 준비하고 종이에 화약을 싸서 풀묶음속에 넣도록 하였으며 성우에는 대포와 큰 돌을 군데군데 갈라 두고 성가퀴에는 가마솥을 걸어놓고 물을 끓이면서 기다리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10월)

김시민은 왜적을 반대하여 떨쳐나선 군사와 인민들에게 적들이 우리의 병력을 알아차릴수 없게 녀인들도 모두 남복차림을 하며 군사들은 한대의 화살, 한알의 총탄도 헛되이하지 말라고 엄명하였다.

김시민이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얼마나 신중하였는가 하는것은 적의 침공직전에 진주성방어를 돕기 위하여 온 지원부대까지 성안에 들여놓지 않은 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10월 초하루(정해일) 류숭인부대가 진주성방어를 돕기 위하여 성밑에 달려와 성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통지해왔을 때 김시민은 장수의 명령체계가 하나같이 치밀하지 못할가 념려하여 성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성문을 단속하고있으므로 여닫을 때 뜻밖의 걱정이 생길가 우려된다. 주관하는 장수는 그저 성밖에서 응원하는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는데 당시 경상도의병장 곽재우는 시민이 숭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이 계책이 성을 보전하였으니 진주사람들의 복이다》고 하였다고 한다.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10월 초하루 정해일)

김시민은 또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발악적으로 공격해오는 적들을 변화무쌍한 림기응변의 전술로 과감히 물리쳤다.

10월 6일 이른아침부터 적들은 세패로 나뉘여 일부는 동문밖 순천당으로, 다른 집단은 봉명루앞으로 또 다른 집단은 향교뒤산으로부터 봉명루에 이르는 구간으로 쳐들어와 성을 세면으로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1 000여명의 조총수가 성안에 대고 일제사격을 하니 그 소리는 우뢰와 같았고 3만의 왜적이 지르는 고함소리는 하늘땅을 진동하는것 같았다고 한다.

이때 김시민은 군사들이 꼼짝하지 않게 하여 성안에 사람 하나 없는듯이 조용하게 하였으며 적들의 소리가 잠잠해질 때를 기다려 즉시 포를 쏘고 북을 치면서 대응하도록 하였다. 적을 예리하게 집중감시하던 진주성방어자들은 일제히 환성을 올리면서 활과 조총, 총통으로 명중사격을 들이대여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적들은 청천벽력같은 집중명중사격에 당황하여 뿔뿔이 흩어졌으며 화살과 총포탄을 막으려고 거리의 대문짝과 널판자를 뜯어내여 방패삼아 성밖에 늘어세우고 엎드려 사격을 피하는데 급급하였다. 그리고 민가를 헐어다가 방책을 6~7리어간에 세우고 밤새 눈먼총질을 그치지 않았다.

첫 공격에서 실패한 적들은 성벽으로부터 멀리 물러가 방책을 세우고 다시 공격할 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진주성방위자들은 사기가 한층 높아졌고 적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10월 7일에도 적들은 아침일찍부터 접어들었다. 적들은 조총을 어지럽게 쏘아대는 한편 화전(불화살)으로 성안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아래에서 올리쏘는 조총사격은 돌성벽을 뚫을수 없었으며 진주성안의 군사들과 인민들은 한사람같이 떨쳐나서 적이 지른 불을 꺼버렸다.

견고한 성벽을 뚫을수도 허물수도 없었던 왜적들의 유일한 공격방도는 성을 넘어 들어가거나 성을 내려다보면서 사격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적들은 참대를 잘라서 엮은 죽편을 동문밖에 수백보나 되게 늘여 세우고 안에는 판자를 세워 성안에서의 사격을 막으면서 그뒤에서 흙산을 쌓아 성벽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 그곳에서 총포를 쏘아대려고 하였다.

김시민의 지휘밑에 진주성안의 군사들과 인민들은 적의 흙산에 대처하여 성안에도 흙산을 더 높이 쌓는 한편 화포로써 적의 흙산을 파괴해버리였다.

10월 8일 진주성에서는 공방전이 더욱 격렬하게 벌어졌다.

성벽에 붙어 기여오를수 없었던 적들은 참대로 수많은 사다리를 만들어가지고 성벽으로 기여오르려 하였고 3층다락(산대)에 바퀴를 달아 굴리면서 그안에 조총수를 숨겨가지고 높은 곳에서 내리쏘면서 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현자총을 쏘아 높은 대우에 있는 왜적을 떨구고 화약을 싼 풀묶음으로는 소나무가지로 만든 장벽을 불태우고 대포로는 참대를 엮어 만든 긴 사다리를 부시는 한편 끓는 물을 퍼붓고 큰 돌을 던지도록 하였다.(《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10월)

김시민의 지휘에 따라 성안의 군민들은 적들에게 질려포와 진천뢰로 명중사격을 퍼붓고 자루가 긴 도끼와 낫으로 적의 사다리를 찍어넘기고 걸어당겨 넘어뜨리고 성밑에 몰킨 적들에게 불뭉치를 안기고 큰 돌을 굴리였으며 끓는 물을 퍼부어 멸살시키였다. 그리고 성안의 형편과 방어력량을 알아차릴수 없게 하기 위하여 수많은 허수아비에 활을 쥐여서 세우고 적이 나타나면 돌팔매질을 하였다.

김시민은 성안의 군사들과 인민들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도록 호소하였으며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적의 그 어떤 공격도 단호히 짓부시도록 지휘하였다.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여 화살이 떨어져가자 하급관리였던 하경해는 적의 포위를 뚫고 성밖으로 나가 100여짐의 화살을 구해왔고 성밖의 인민들은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어 성안에 보내주었다.

한편 성밖에서도 성안의 방어자들을 돕기 위한 투쟁이 적극적으로 벌어졌다. 이날밤에 고성현령 조응도와 복병장 정유경이 지휘하는 의병들은 홰불을 들고 남강밖 진현우에 올라서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기세를 올리였으며 성안에서도 종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사기를 돋구었다.

의병들의 적극적인 지원에 당황한 적들은 원병을 막기 위하여 도처에 복병을 펴놓는 등 복새통을 피우지 않을수 없었고 온밤 뜬눈으로 새우게 되였다.

10월 9일 적들은 의병들의 지원을 막기 위하여 2 000여명의 졸병을 단성에 보내여 사방에 흩어져 도처에서 불을 지르면서도 성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적들은 진주성안에 대고 종일토록 사격을 계속하였으며 흙산을 쌓아올리는 공사도 더 급하게 다그쳤다. 그리고 성벽보다 높은 산대우에서 성안에 대고 더 어지럽게 사격을 가하였다.

진주성방위자들은 성우에 설치해놓은 현자포와 질려포, 진천뢰 등으로 명주사격을 퍼붓고 끓는 물과 풀묶음, 큰 돌들을 안기여 적들의 공격을 성과적으로 물리쳤다. 이리하여 왜적의 더러운 주검은 산더미로 쌓이였다.

10월 10일 적들은 마지막발악을 하였다.

적들은 병영마다에서 짐을 실어내면서 퇴각하는듯이 가장하여 성안의 방어자들을 해이되게 하려고 하였으며 얼마후에 1만여명을 갑자기 내몰아 진주성의 동문신성으로 육박해왔다.

왜놈들은 방패와 널판자, 멍석 등을 닥치는대로 뒤집어쓰고 긴 사다리를 성벽에 대고 기어이 성을 넘어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왜병들은 개미떼같이 성벽에 기여오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적기병 1 000여명은 공격하는 제놈들을 엄호하기 위하여 돌진하면서 조총을 쏘아대여 총알이 비오듯 하였으며 소리 또한 요란하였다. 왜병들은 피흘리며 무리로 쓰러졌으나 적장들은 말을 달리고 칼을 휘두르면서 성벽으로 기여오르라고 독촉하였다.

진주성방어자들은 지치고 피로하였으나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군사들은 물론 남녀로소 가림없이 전체 인민이 떨쳐나 왜적의 머리우에 진천뢰, 질려포를 쏘아 터뜨리고 큰 돌을 굴리였으며 마름쇠를 팔매치고 불뭉치를 던지였으며 끓는 물을 퍼부었다. 삽시에 동문신성의 주변에는 왜적의 주검이 산을 이루었고 적의 전투서렬은 수라장이 되였다.

진주성동쪽에서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이번에는 북문으로 1만여명의 왜적이 돌격해왔다. 적들은 수많은 긴 사다리를 걸고 성을 넘으려고 하였다.

적의 불의의 공격에 성 북쪽을 지키고있던 군사들은 일시 당황하였으나 장덕량, 리눌, 윤사복을 비롯한 용사들의 결사적인 투쟁으로 위급한 사태를 수습하고 동문일대에서와 같이 영용한 투쟁을 벌려 적을 쳐부셨다.

이와 같이 진주성의 군사들과 인민들은 한덩어리가 되여 적의 발악적인 공격을 쳐부시고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전투를 진두에서 지휘하던 김시민이 적탄에 부상당하자 곤양군수 리광악이 그를 대신해서 지휘하여 적의 최후의 공격을 끝내 격파하였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도 성을 함락시킬수 없었으며 공격을 진행할 때마다 섬멸적인 타격을 받아 유생력량이 줄어들었고 의병들과 관군에게 역포위되여 전멸의 위기에 직면한 적들은 제놈들의 시체를 대충 그러모아 불지른 다음 전투기재를 내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진주성방어자들은 김시민의 지휘밑에 10월 6일부터 10일까지 연 5일에 걸쳐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공격을 감행하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격파하고 성을 빛나게 수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지휘관 300여명을 포함하여 수많은 침략군을 잃었고 군사기재도 막대한 손실을 당하였다. 진주전투에서 왜적의 패배가 얼마나 컸던지 적장의 한놈인 하시바는 제소굴에 돌아가서 분통이 터져 죽었다고 한다.

이것을 력사에서는《진주대첩(진주에서의 대승리)》이라고 한다.

진주성방어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쟁취할수 있었던것은 관군과 의병, 인민들이 굳게 뭉쳐 용감하게 싸운데 있었으며 또한 진주목사였던 김시민이 전투준비를 철저히 갖춘데 기초하여 림기응변의 전술로 전투지휘를 능숙하게 진행한데 있었다.

진주성방어전의 승리는 전라도를 강점함으로써 조선수군에 타격을 가하고 전쟁국면을 저들에게 유리하게 전환시켜보려고 꾀하던 적들의 기도를 파탄시켰으며 침략자들을 더욱더 헤여날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었다.

1592년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한산도해전에서의 승리와 함께 임진조국전쟁에서 조선인민이 거둔 큰 승리의 하나였다.

진주대첩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조국전쟁시기의 3대첩으로 조국청사에 길이 전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