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려서부터 백두산을 조종의 산으로 특별히 사랑하고 숭상해온것은 조선민족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였다.》 (
예로부터 조선민족은 백두산을 우리 나라뿐아니라 동북아시아의 모든 산줄기들의 시원으로, 우리 민족사의 터전이 마련된 성산으로 간주하면서 숭배하여왔다.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이 지질학적 및 지리학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모든 산과 산줄기의 시원, 근원을 이루고있는 산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숭배하였다.
대표적인 실학자의 한사람인 리익은 자기의 저서인 《성호새설류선》에서 《백두산은 동방산맥의 조종이다.》라고 전하였고 신경준도 《강계고》에서 《백두산은 바로 삼국(조선, 중국, 일본) 여러 산들의 조종이다.》라고 서술하였다.
백두산은 단순히 산이라기보다 그 신비롭고 장엄하고 웅대한 자태로 하여 우리 선조들속에서 우리 민족사의 발상지로 신성시되여왔다.
우리 나라의 첫 민족국가인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이 태여난 태백산도 평양의 강동에 있는 대박산이였지만 우리 선조들속에서는 력대적으로 백두산으로 보는 관념이 지배한것으로 하여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도 《단군이 태백산 박달나무아래로 내여왔다. … 이것은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킨것으로서 우에서 말한 장백산이 이것이다. 즉 단군이 내려온 땅이다.》라고 전하였다.
태백산을 백두산과 련결시킨것은 건국시조의 출생과 국가성립과 같은 사변이 하늘과 잇닿은 높은 산, 숭엄하고 신비로운 백두산과 같은 령산에서 시작된다는 민족적감정으로부터 나온것이며 그것은 이미 고조선시기에 존재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그러기에 고대 우리 선조들이 백두산을 고대조선말에서의 크고 밝다는 의미로서 부른 이름이 한자로 옮겨져 불함산이라고 한것이 중국의 고대지리책인 《산해경》(제14대 황동경조)에도 기록되였다.
중세에 들어와서도 백두산은 우리 인민들속에서 조종의 산, 국가의 발상지로서 숭배대상으로 되여왔다.
고구려사람들은 고구려건국과정을 백두산과 결부시켜 시조왕 고주몽의 부모들인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류화가 인연을 맺은 곳이 태백산(백두산) 남쪽 우발수였다고 기록하였다.
자신들을 단군의 후손으로, 자기 나라를 고조선의 계승국으로 인정해온 고구려사람들은 주몽에 의한 건국을 백두산에서 이루어진것으로 인정하고 백두산을 건국시조의 발상지로 숭배하였던것이다.
이로부터 《위서》(권100 렬전 88 물길조)에서는 고구려시기 세속 즉 일반사람들속에서 이 산(백두산)을 심히 공경하여마지 않았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계승국인 발해에서도 백두산을 자기 나라의 건국과 뗄수 없는 성산으로 간주하였다.
《삼국유사》(권 제1기이, 제2말갈, 발해)나 《제왕운기》(권하, 동국군왕개국년대)에서 《고구려의 유민들이 북쪽으로 태백산(백두산)아래에 의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고 전하고있는데 이것은 발해의 성립자들이 고조선이래의 건국발상지인 백두산에서 나라를 세움으로서 해동성국의 튼튼한 기초를 마련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도 자기 왕조의 창건을 백두산과 결부시키였다.
《고려사》(왕세계)에 의하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을 《백두산으로부터 두루 다니다가 부소산(개성 송악산)에 이른》 인물인 성골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백두산은 나라의 발상지로 숭배되였다.
1767년 좌의정 한익모는《우리 나라의 강과 산들이 모두 이 백두산에 근원을 두고있는것만큼 실로 백두산은 우리 나라 조정의 국가발상지이다. … 우리 나라의 모든 산들이 다 백두산을 시원으로 줄기가 뻗어있기때문에 백두산주변도 력대 조상들이 일떠서고 부흥한 발상지라고 할수 있다.》고 말하였다.
백두산은 그 위엄있는 자태로 하여 우리 선조들속에서 국가수호의 성산, 민족정기의 구심점으로 숭배되여왔다.
1131년 묘청을 비롯한 서경출신량반들은 서경(평양)천도를 시도하면서 림원역(평양시 룡성구역)근방에 새 왕궁인 대화궁을 건설하고 여덟신선의 위패를 둔 팔성당을 설치하였다. 이 여덟신선가운데서 첫자리에 호국백두악태백선인을 내세웠는데 이것은 당시 고려사람들이 백두산을 고려봉건국가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동시에 백두산산신령이 고려봉건국가를 보호해줄것이라고 굳게 믿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백두산이 민족의 넋과 정기가 체현된 성산, 국가수호의 명산으로 숭배하였다.
최근에 발굴된 백두산천지호반 향도봉소분지의 제단시설과 그와 관련한 2건의 금속문은 조선봉건왕조 초기 즉 15세기경에 우리 선조들이 백두산에 올라 여러가지 활동을 진행하면서 천지호반에 제단을 설정하고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사활동을 진행하였다는것을 뚜렷이 실증해주고있다.
그 이후 조선봉건왕조의 제21대왕이였던 영조는 백두산이 우리 나라의 조종의 산이라는것이 더욱더 명백하다고 하면서 조상전래의 관습대로 백두산 산신의 신위관(산신의 급수별에 따르는 위패)의 급수를 높이 정하여 해마다 1월, 2월, 8월에 《좋은 날》을 택하여 제사를 지내는것을 관례로 삼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백두산일대의 망덕산에 제각과 제단이 설치되고 1768년 1월부터 봄과 가을에 한번씩 백두산망향제가 진행되였다.
1931년 안재홍이 쓴 백두산기행문인 《백두산등척기》에도 1821년에 왕이 부령군수 고승익에게 지시를 내려 홍단령사에서 제를 지내게 했다는것과 그것으로 하여 사당의 면모가 더욱 일신되였다는 기적문이 홍단산의 홍단각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홍단령사에서 국왕의 지시를 받들어 진행한 국가제사는 백두산신령을 숭배하여 진행한 제사였다.
근대시기에 들어와 백두산은 단군신령이 내린 성지로 나라의 번영을 지켜주는 신성하고 거룩한 성산으로 높이 숭배되였다.
대표적으로 《동아일보》 8월 29일부 신문에서는 《천고의 신비경인 천지의 전경》이라는 표제밑에 본사특파사진반이 찍어온 장엄한 백두산천지의 촬영사진을 싣고 그아래 《… 조선민족의 무한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강연회이다. … 시작전부터 물밀듯이 몰려온 군중들로 순식간에 회의장은 정결한 흰옷입은 사람들로 만원이 되고 장내에 들어서지 못한 수천명의 군중은 다들 문밖에 몰켜서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라고 하면서 성대한 강연소식을 전하였다.
이처럼 우리 인민들은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시기 백두산을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원해주는 거룩하고 신성한 산으로 숭배하였으며 백두산에 종덕사와 룡신비각을 세우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지켜줄것을 애타게 갈망하였다.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깡그리 말살하려던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에도 이렇게 백두산은 민족을 구원해줄 장수별이 솟은 성산, 민족정기의 구심점으로서 널리 숭상되였던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국가의 운명과 떼여놓을수 없는 성산, 민족의 성지로 간주하고 대대로 숭배하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