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바둑으로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이바지한 고구려의 중 도림

 2020.9.22.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운데서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온 나라는 고구려였다.》 (김정일전집》 제2권 160페지)

고구려는 삼국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고구려사람들은 나라의 삼국통일위업실현에 자기의 지혜와 슬기를 다 바쳤다. 그러한 사람들가운데는 바둑명수인 중 도림도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도림은 젊어서부터 바둑을 배워(學碁) 꽤 묘한 수를 알게 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도림이 바둑명수로 활동하던 당시 고구려뿐아니라 백제와 신라에서도 바둑은 널리 보급되여있었다.

력사기록들을 보면 바둑을 혁(奕), 기(碁), 위기(圍碁) 등 여러가지로 표기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왕 근개루가 박혁(博奕-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고 같은 책의 신라본기에는 선기(善碁)라고 하여 신라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고 하였으며 국고혁(國高奕) 즉 나라의 바둑고수라고도 썼다.

이러한 기록들은 삼국시기에는 벌써 바둑이 사람들속에 널리 보급되였던 사실을 말해주고있다.

바둑은 두사람이 바둑판에 번갈아놓으면서 차지한 밭의 넓이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로서 그 수가 많고 다양하여 사람들의 사고력을 키우고 지혜와 재능을 계발시킬뿐아니라 전투정신배양에도 좋았다. 때문에 바둑은 일찍부터 군사가들이 전술을 익히는 수단의 하나로 많이 리용되여왔다.

이러한 바둑을 리용하여 도림은 나라를 위한 일에 자진하여나섰다.

도림이 활동하고있던 5세기말 고구려는 국토통일위업을 힘있게 밀고나가는데서 기본장애로 되고있던 백제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두 방면에서 이 사업을 밀고나갔다. 하나는 백제내부를 약화시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규모적인 접전을 계속하여 무력을 약화시키는것이였다.

고구려에서는 백제왕정내부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중 도림을 파견하였다. 그것은 당시 백제의 왕인 개로왕이 바둑을 잘하였으므로 바둑명수인 도림을 파견하면 얼마든지 그 일이 성공할수 있다고 타산하였기때문이였다.

도림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해온것으로 가장하고 백제에 침투해들어갔다.

그는 바둑으로 백제왕과 친숙해졌고 백제왕은 그를 높은 손님으로 대접하면서 지어 서로 늦게 만난것을 한탄하기까지 하였다.

때를 기다리던 도림은 백제왕에게 이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둔덕, 강과 바다로 둘러막혀 하늘의 조화로 이루어진 요해처이니 감히 이웃나라들이 넘겨다보지 못한다고 하면서 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는 응당 수도성과 왕궁을 크게 수축하고 부왕의 무덤도 크게 꾸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곧이들은 개로왕은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안에 궁전, 루각, 정자 등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게 하였으며 멀리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돌곽을 만들어 부왕을 장사지냈고 강을 따라 제방공사까지 벌려놓았다. 그리하여 창고들은 텅 비고 인민들의 생활은 령락되여 나라는 위태롭게 되였다.

이때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가 장수왕에게 백제의 실태를 그대로 보고하였다.

오래전부터 준비를 갖추고있던 고구려는 475년 9월 백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백제수도를 공격한 고구려군은 불과 한주일사이에 백제의 북성을 점령하고 련이어 남성을 공격하였다. 개로왕은 서쪽으로 도망치던 도중에 붙들려 죽고말았다.

결과 고구려는 한강이북의 많은 지역을 차지할수 있었다.

이렇듯 고구려의 중 도림은 바둑으로 동족의 단합실현에 이바지한 사람으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였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오랜 력사를 자랑하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바둑이 지능계발을 위한 민족체육의 하나로 장려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