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우리 인민에게 흰쌀밥을 먹이시려

 2021.5.1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늘 인민들에게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이는것이 소원이라고 하시면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포전길을 걸으며 온갖 로고를 다 바치시였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2권 210페지)

매개 민족은 자기 고유의 식생활풍습이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빵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이 있는가 하면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민족도 있고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민족도 있다.

하지만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밥을 주식으로 하여왔다.

우리 인민이 즐겨먹는 밥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가운데서도 제일 좋아하는것이 흰쌀밥이다. 그러나 지난날 평범한 백성들은 아무리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흰쌀밥 한알 입에 넣을수 없었다.

흰쌀밥, 오늘 이것이 우리 인민모두가 즐겨먹는 주식으로 된데는 우리 인민들에게 흰쌀밥을 먹이시려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의 력사가 뜨겁게 깃들어있다.


흰쌀밥을 먹이는것이 수지타산으로 되여야 한다시며

주체38(1949)년 9월 21일 이른새벽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분계연선지대 인민들의 생활을 보살피시기 위하여 황해도로 현지지도의 길을 떠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일행은 수려한 산발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수안면 하유리(당시)에 이르러 잠시 휴식하게 되였다.

하유다리우에 차를 세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차에서 내리시여 천천히 다리를 거니시다가 산도 좋고 물도 좋고 산골치고는 벌도 넓은데 논이 없다고 못내 서운해하시였다.

수안면이 한눈에 안겨오는 넓은 공지에 오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시며 깊은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동행한 한 일군에게 이 고장 인민들에게 흰쌀밥을 먹이자면 강물을 양수기로 퍼올려서 논을 풀어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아안고 잠시 생각을 굴리던 일군이 여기에 논을 풀자면 전기를 끌어와야 하고 양수장을 여러개 건설하여야 하는데 여기서 생산될 쌀생산량에 비하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살림살이를 책임진 전형적인 경제일군으로서 모든 일에서 언제나 수지타산부터 해보는 그 일군의 깐진 일솜씨를 대견히 여겨주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잠시후 수령님께서는 경제관리에서 수지타산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인민들에게 더 좋고 행복한 생활을 보장하자고 하는데 거기에 수지타산을 앞세워서야 되겠는가, 우리 인민들에게 흰쌀밥을 먹이는것이 곧 우리의 수지타산으로 되여야 한다고 따뜻이 일깨워주시였다.

계획을 하나 세우고 타산을 하나 해도 언제나 인민을 먼저 생각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지 못하고 순수 경제적리익만 생각한 그 일군은 물론 수행한 일군들모두가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얼마후 하유리에는 5개의 양수장이 건설되고 80여정보의 논이 정리되여 마을이 생겨 처음으로 흐뭇한 벼농사를 지을수 있게 되였다.


《피앗골》이 《흰쌀골》로


해방이 되여 2년후인 주체36(1947)년 5월 4일 이른아침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면 중흥리(당시) 절골관개공사장을 찾으시였다.

당시 이곳은 피쌀밖에 나지 못한다고 하여 《피앗골》로 불리워온 고장이였다.

이 고장의 농민들은 해방후 위대한 수령님의 은덕으로 제 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지어 피쌀이라도 배불리 먹게 되자 모두가 흰쌀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러한 의향들이 모아져 청천강의 물을 끌어올려 대담하게 논을 풀자는 토의가 진행되고 온 마을사람들의 간절한 기대와 관심속에 물길공사가 시작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무런 기별도 없이 관개공사장에 찾아오시였던것이다.

공사장에 이르시여 험한 길을 걸으시며 공사형편을 하나하나 알아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버럭을 운반하는 한 녀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그 녀성으로 말하면 《피앗골》에서 오래동안 살아온 사람으로서 해방전 먹을것이 없어 자식들을 모두 굶겨죽인 녀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녀인의 거친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나이많은 분이 수고한다고, 왜 이런 힘든 일을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따뜻한 인정미가 흘러넘치는 수령님의 말씀에 녀인은 눈물을 머금으며 물길공사가 진행되게 된 경위와 함께 한뉘 제땅이 없어 자식들을 모두 굶겨죽였는데 오늘은 이렇게 수령님께서 주신 땅에 물을 끌어 논을 푼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자식들생각이 더욱 난다고 자기의 속마음까지 터놓았다.

녀인의 소박한 말에서 여기 농민들의 흰쌀에 대한 소원을 헤아리시듯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확신에 넘치신 어조로 지난날 《피앗골》농민들이 나라없던탓에 사람 살지 못할 이 척박한 곳에 들어와서 피나 조밥만 먹으며 살아왔는데 오늘날에 와서야 왜 그렇게 살겠는가고 하시면서 논으로 풀수 있는 땅은 다 논으로 풀어 지금까지 고생한 사람들에게 흰쌀밥을 먹게 해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공사에서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서슴없이 다 제기하라고 이르시였다.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공사를 내밀고있지만 농사철전에 논을 다 풀기가 어려울것 같다는 녀인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무엇이 제일 걸리는가고 다시금 물으시였다.

이날 공사에서 걸린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에서 도와줄테니 공사를 다그쳐 모내기전으로 끝내야 한다고 하시면서 남은 공사를 끝낼 방도에 대해서도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수난의 세월이 가져다준 척박한 가슴에 난생 처음으로 받아안은 인정깊은 념려와 다심한 사랑에 어리둥절하였던 녀인은 물론 이곳 농민들은 후날에야 자기들의 소박한 의견도 헤아려주시고 대대로 품어오던 세기적숙망을 풀어주시려 그처럼 마음쓰신분이 다름아닌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는것을 알고 너무도 감격하여 동구밖에 나와 평양하늘을 우러러 삼가 큰절을 올리였다.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군인들과 관계부문 기술자, 전문가들 그리고 많은 식량이 도착하였고 어버이의 따뜻한 그 사랑에 떠받들려 천년 흐른 청천강의 맑은 물이 이 고장에 흘러드는 꿈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이렇듯 어버이수령님의 깊은 관심과 로고에 의하여 어제날의 《피앗골》이 《흰쌀골》로 전변되여 흰쌀밥을 먹고싶어하던 이 고장 농민들의 평생소원이 풀리게 되였다.


새로 지어주신 이름-《흰쌀밥》

우리 인민들의 식생활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돌려오시며 보다 유족한 생활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마음써오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53(1964)년 2월 어느날 일군들과 자리를 같이하시고 인민들의 먹는 문제와 관련한 귀중한 교시를 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리를 같이한 일군들에게 원래 《이밥》을 쌀밥이라고 하였는데 그전에는 왕들만 먹었다고 하여 왕밥이라고 하였다고, 우리 농민들이 얼마나 쌀밥이 먹고싶었으면 왕밥이라고 하였겠는가고, 그러던 왕밥이 《이밥》으로 된것은 조선봉건왕조시기부터인데 리가성을 가진 귀족들만 먹었기때문에 이때부터 《이밥》이라고 하였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자신께서는 《이밥》이라고 하지 말고 흰쌀밥으로 하라고 하였다고 신중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전에는 우리 인민들이 명절이나 혹은 생일날에 흰쌀밥을 조금씩 먹었지 그외에는 늘 수수죽만 먹었다고 하시면서 전체 인민들이 다 흰쌀밥을 먹게 하는것은 우리 인민의 세기적숙망을 해결하는것으로 된다고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흰쌀밥을 먹게 하는것이 우리 인민의 세기적숙망을 실현하는것이라 하시며 《이밥》이 아니라 흰쌀밥으로 부르도록 하여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심중의 뜻이 어려와 숙연해지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였다.

이처럼 《흰쌀밥》이란 한마디 말속에도 세기와 세기를 이어오면서 《흰쌀》의 주인이 되지 못하였던 인민들의 눈물겨운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 인민들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문명한 인민으로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이 어리여있다.

예로부터 그 나라의 정치를 알려거든 백성들의 밥상을 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력대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는 그 어느 정치가도 인민의 주식문제에까지 관심을 돌려본 일이 없다.

하기에 오늘도 우리 인민들은 밥상에 오르는 흰쌀밥을 마주할 때마다 한평생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고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포전길을 걷고걸으시며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로고와 헌신의 력사를 가슴뜨겁게 돌이켜보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