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위대한 수령님께서 80고령에도 잊지 못해하시였던 노래 《소무가》

 2022.12.1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80고령에도 잊지 않으시고 종종 풍금으로 타보기도 하시고 휘파람으로도 불어보시였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바로 중국인민의 애국주의적사상감정을 잘 반영하고있는 노래 《소무가》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소무가〉의 가사를 찾으려고 애쓰시다가 몇해전에야 찾으시였는데 그때 너무도 기쁘시여 그 노래를 몸소 부르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 〈사향가〉와 〈소무가〉를 부르시는것을 록음한 테프를 내가 보관하고있는데 그것은 매우 귀중한 재부입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8권 35페지)

조선혁명처럼 노래와 밀착된 혁명, 노래로 엮어진 혁명은 아마 세상에 없을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 그 자체가 하나의 장중한 교향곡이고 노래를 낳는 터전이라고 하시면서 혁명이란 사상의지나 규률만을 가지고 하는것이 아니라 사상의지, 도덕의리와 함께 랑만적인 감정정서를 가지고 하는것이라고 하시였다.

항일혁명의 전로정에 그것을 강렬히 체험하시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말 원문으로 된 《소무가》의 가사를 얻으시였을 때에는 너무도 기쁘시여 80고령이라는것도 잊으시고 노래를 부르시며 북만의 대지를 그려보시였고 생애의 전 기간 문학과 예술을 혁명의 무기로 내세우시였다.

주체24(1935)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지반을 튼튼히 마련하시기 위하여 제2차 북만원정의 길에 오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만을 개척하는데서 액목땅을 중시하시였다. 그런데 당시 그 지방의 사람들은 일제의 악착한 반공바람에 심히 중독되여 공산주의자라면 도리를 떨고있었다.

원정대는 경박호를 건너 액목땅에 첫 발을 들여놓기 바쁘게 주민들로부터 심한 랭대를 받게 되였다. 그 부락은 중국사람들만 사는 마을이였는데 부대가 도착하자 마을사람들은 아이들까지 데리고 인가에서 달아나버렸고 남아있던 로약자들까지도 집에 숨어서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락에서 얼마쯤 떨어진 수림속에 천막을 치고 대원들을 휴식시킨 다음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시였는데 소학교의 교직원, 학생들까지도 다 숨어버리고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학교마당에 풍금을 내다놓고 타시면서 대원들과 함께 중국의 근로대중이 특별히 애창하는 명곡들인 《소무가》와 양귀비의 노래를 부르시였다.

《소무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길림시절에 배운 애국가요였는데 원명은 《소무목양》이다.

소무는 B.C.2세기 한나라의 충신으로 명망이 높았던 실제인물이였다. 한나라왕의 사신으로 북쪽의 흉노족들에게로 갔었는데 흉노족들은 그를 인질로 잡아놓고 저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수양이 새끼를 낳을 때까지는 돌아가지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소무는 19년간이나 흉노족들속에 갇히워있었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여 《소무가》는 중국인민의 애국주의적사상감정을 잘 반영하고있는 노래였다.

1.소무는 호지에 잡혀있어도

절개를 욕되게 하지 않았네

눈과 얼음덮인 흉노땅에서 19년

목마르면 눈을 먹고

배고프면 요털을 삼키며

북해변에서 양을 몰았네

마음은 한나라에 가있으나

늙도록 몸은 돌아가지 못했네

모진 고생 겪을수록

마음은 철석으로 굳어져

변강의 밤 때로 피리소리 들으면

가슴은 아프고 쓰리였네


2.소무는 호지에 잡혀있어도

바다가 마르고 돌이 썩는다 해도

큰 절개는 조금도 굽히지 않아

흉노들도 놀라서 그 위덕에 탄복하였네


노래소리를 듣고 먼저 숨어있던 소학교 상급반학생들이 호기심과 놀라움을 안고 모여와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으며 그 다음에는 교원들과 동네어른들이 하나둘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도망갔던 마을사람들이 운동장에 다 모이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말로 반일연설을 하시였다. 그 연설까지 듣고서야 그들은 《고려홍군》은 비적도 아니고 마적도 아니다, 진짜 애국적인 혁명군이며 신사멋쟁이군대라고 하면서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그때 《소무가》를 가지고 북만땅의 중국사람들을 감화시켰다고 말할수 있다고, 이 일을 통해 자신께서는 문학과 음악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각성시키는데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를 실제로 체험하였다고, 문학과 예술을 혁명의 무기로 중시하는 리유가 그때의 체험에 근거를 두었다고도 볼수 있다고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서거하신 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영화문헌 《인민을 위한 길에 언제나 함께 계셨습니다》의 창작사업을 지도하시면서 문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사향가》를 부르시는 장면이 있는데 수령님께서는 중국노래 《소무가》를 부르신적도 있다고 하시면서 그것도 편집하여 넣도록 하시였다.

80고령에도 《소무가》를 부르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은 오늘도 우리 인민들과 중국인민들을 크게 감동시키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