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불멸의 혁명송가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송가들가운데서 <
송가는 일제식민지통치의 가장 암담하던 시기에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시고 20성상에 걸쳐 험난한 투쟁의 가시덤불길을 몸소 헤치시면서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의 한길로 이끄시여 불멸의 혁명업적을 쌓으신
또한 가사는 항일혁명전쟁의 불길속에서 이룩하신
노래는
혁명송가의 가사를 창작한 리찬선생은 해방후
그는 1910년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에서 출생하였으며 1930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지만 학비곤난과 일제의 박해로 1년도 못채우고 중퇴당하였다.
그는 시창작에 나선 첫날부터 모순에 찬 당대사회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는 애국적인 시들을 창작하여 여러차례 일제경찰에 체포구금되였다.
해방후 그는 조국해방의 새 아침을 안고 개선하신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35(1946)년 4월 그는
이날
그의 랑송이 끝나자 장내에서
연회가 끝난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를 축하해주며
나라가 해방되고 온 민족이
그는
혁명송가창작에 깊은 관심을 돌리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는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마음을 담은 노래를 짓자니 항일무장투쟁과 관련한 자료를 잘 몰라서 애로를 느끼고있다는 시인의 솔직한 심정을 헤아리시여 자신께서 항일의 나날 언제나 소중히 품에 안고 애용하시던 혁명가요집을 보내주시였으며 몸소 시인의 집에까지 찾아오시여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이렇듯 세심한 가르치심속에서 리찬선생은 마침내 불멸의 혁명송가
혁명송가의 선률을 창작한 김원균선생은 당의 품속에서
위대한 수령이 위대한 시대를 창조하며 수령이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것은 력사가 증명하는 진리이다.
위대한 수령을 모시지 못했던 해방전 김원균선생의 운명은 비참하였다.
1917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여난 그는 어린시절부터 미술과 음악에 남다른 취미가 있었으나 학비를 댈수 없어 학교에서 쫓겨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막로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국해방의 력사적사변을 맞이하던 날 그는 사람들속에 뛰여들어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웨쳤으며 그 이튿날에는 끓어오르는 심정을 그대로 담아 《조선행진곡》을 창작하였다. 노래는 삽시에 해방열, 건국열을 더해주며 사람들속에 널리 보급되였다.
그무렵 김원균선생은 한 일군으로부터 한편의 가사를 넘겨받았다.
순간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끓어올랐다.
그날 평양공설운동장에서
백두산 줄기줄기에 새겨진 거룩한 자욱, 끝없이 흘러가는 전설의 혁명대오, 랑랑한 나팔소리, 멸적의 총성, 화광이 춤추는 보천보, 해방과 함께 울고 웃으며 환희와 기쁨에 넘쳐 끓어번지는 이 나라 천지…
그 모든것이 선률이 되였다.
숭엄한 송가적특성과 힘있고 전진적이면서도 행진곡적성격이 훌륭하게 융합된 명곡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오늘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인류문명사에 노래창작의 력사가 시작된 때로부터 오늘까지 세계적으로 나온 노래는 셀수 없이 많다. 그러나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부르며 세기와 세기를 이어가는 거대한 생명력을 지닌 노래는 찾아보기 어려울것이다. 평양에서 진행되는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게 될것이다. 국적도 피부색도 언어도 달리하는 출연자들이 자기 나라 인민들의 심장의 목소리를 합쳐부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