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조국해방전쟁(1950-1953)시기 조선인민이 이룩한 자랑찬 승리의 력사에는 미제가 전쟁을 도발한 후 즉시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가 3일만에 서울을 해방한 혁혁한 전과도 아로새겨져있다.
이 력사적인 승리는 천리혜안의 선견지명과 무비의 담력, 뛰여난 령군술을 천품으로 지니신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승리는
서울해방작전은 비범한 군사전략가이신
군사일군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이께서 정해주신 주타격방향인 서울은 적의 력량이 밀집되여있는 가장 강한 고리, 적의 심장부였던것이다.
청소한 인민군대가 적들의 력량이 집결되여있는 적의 아성을 해방한다는것은 보통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
더우기 기존의 전쟁교범에는 주타격방향은 적방어의 가장 약한 곳이여야 하며 그래야만 공격의 전과를 확대할수 있다는것이 일반적원칙으로 되여있었다.
서울은 적들의 기본집단이 집중되여있는 가장 위험한 곳이였다.
이것은 적의 심장부에 력량을 집중하여 첫탕에 된매를 안김으로써 단 한차례의 공격작전으로 적의 기본집단을 전면적붕괴에로 몰아넣을수 있게 하는 대담하고 통이 큰 군사전략이였으며 세계군사예술사에 있어본적 없는 일대 사변이고 기적이였다.
조선인민군부대들의 서울진입이 박두하게 되자 멸망의 공포에 질린 적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소동을 피웠고 서울시내는 삽시에 온통 수라장이 되였다.
미국대사 무쵸는 6월 27일 4시 서울을 빠져 도망쳤고 혼비백산한 리승만역도도 금덩어리를 걷어가지고 3시에 렬차를 타고 황급히 대전방향으로 도망쳤다.
전선서부와 중부에서 얻어맞고 퇴각하던 괴뢰군패잔병들과 부상병들이 서울바닥에 사태처럼 쓸어들고 돈뭉치와 금덩어리를 안고 도망치는 괴뢰정부의 장, 차관들과 매판자본가들로 하여 인산인해를 이룬 한강다리어구는 악마구리 끓듯 하였다.
하늘에서는 조선인민군비행기들이 항복하라는 삐라를 뿌리고 조선인민군대의 포성이 점점 가까와오는데다 조선인민군소부대들이 여기저기에서 타격을 시작하게 되자 겁에 질린 적들은 6월 28일 2시 15분에 한강다리를 폭파하였다.
수백대의 차량과 무리를 지어 도망쳐가던 괴뢰군들이 한강에 그대로 수장되였으며 비명소리, 고함소리에 말그대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펼쳐졌다.
6월 28일 5시, 서울시에 대한 조선인민군련합부대들의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조선인민군부대들이 시내에 돌입하자 적들은 도로굽이에 직사포를 배치하고 땅크들의 진격을 가로막아나섰으며 건물의 꼭대기와 창문들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집중사격을 가하여왔다.
도로굽이와 건물들에 포화를 들씌운다면 적들의 저항을 쉽게 분쇄할수 있었지만 인민들의 생명재산과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보호할데 대한
하여 조선인민군군인들은 능숙하고 령활한 전투활동으로 적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며 성과를 확대해나갔다.
적의 마지막숨통을 조이는 피어린 격전을 벌리며 괴뢰《중앙청》으로 돌입한 312호땅크의 포장은 기발대에 람홍색공화국기를 높이 휘날렸다.
11시 서울방송국을 점령한 제9땅크려단(당시) 문화부려단장은 방송마이크를 잡고 격정에 넘쳐 서울시민들에게
참으로 영용한 조선인민군대가 전쟁개시 3일만에 승리로 결속한 서울해방작전은
서울해방작전에서 우리 인민군대는 적 2만 1 000여명을 살상포로하였으며 각종 포, 저격무기, 땅크, 자동차, 비행기 등 수많은 전투기재들을 파괴, 로획하였다.
적들도 《전체의 반이상이 서울함락전 3일간에 전사했거나 부상, 포로당하였다.》고 개탄하였으며 《륙군본부는 9만 8천명이 올라있던 병적부에서 불과 2만 2천명밖에 확인할수 없었다.》고 비명을 질렀다.
이것은 적들의 기본집단이 단순히 패한것이 아니라 붕괴되였다는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서울해방작전이 빛나는 승리로 결속됨으로써 총체적인 반공격임무의 절반이상이 수행되게 되였으며 적들의 무력침공을 단호히 쳐부시고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할수 있는 근본열쇠가 마련되게 되였다.
서울해방, 그것은 천출명장이신
력사의 그날로부터 세월은 멀리도 흘렀지만 우리 나라를 순간에 삼키려던 적들의 전면적인 무력침공을 단호히 짓부셔버리고 3일만에 괴뢰통치의 아성인 서울을 해방한 전대미문의 군사적기적은 전승의 7.27과 더불어 조국청사에 길이 전해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