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혁명렬사의 유가족에게 돌려주신 사랑의 이야기

 2024.4.12.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혁명의 탁월한 령도자이시고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으며 위대한 인간이시였습니다.》

우리 수령님의 한생에는 참으로 감동깊은 일화들이 많고많다.

그 감동깊은 일화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느라면 우리 수령님이시야말로 혁명의 위대한 수령, 한 나라의 주석이시기 전에 위대한 인간,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라는것을 가슴뿌듯이 느끼게 된다.

그 일화들중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초기혁명활동을 벌리시던 시기의 동지였고 해방후 출판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저자인 최일천과 그의 가족들에게 돌려주신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

주체81(1992)년 말 어느날 최일천의 부인과 아들이 살고있는 미국 오리곤주 포틀런드시의 어느한 집에는 자자손손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가보가 생기였다. 그 가보는 선친들이 넘겨준 값진 유물이 아니라 다름아닌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이였다.

그날 아들이 가져온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한장한장 번져나가던 부인은 회고록의 앞부분에 있는 사진자료들중에서 뜻밖에도 남편의 력작인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보게 되였다.

부인은 책이 발행된지 반세기가 되여오는 때에 수령님의 회고록에서 그것을 다시 보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감회에 젖어 회고록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앞에 이번에는 주석님께서 쓰신 다음과 같은 글발이 비쳐들었다.

《그때 우리가 추켜들었던 타도제국주의동맹의 리념이나 기개에 대하여서는 해방직후 최일천(최형우)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ㅌ.ㄷ〉와 김일성〉이라는 제목으로 그 일단을 서술했다고 생각한다.》

그이께서는 아버님의 친지인 오동진의 집에서 있은 남편과의 첫 상봉에 대하여 그리고 오가자마을을 혁명화하시는 나날에 그와의 교분관계가 두터워진데 대하여 인상깊게 추억해주시였다. 더우기 회고록 제2권에는 남편의 젊은 시절 사진까지 실려있었다.

(주석님께서 우리 령감을 잊지 않고계시였구나. 주석님의 마음속에 령감이 아직도 살아있었어.)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을 곱씹어 읽으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이 말을 수십번이나 외웠다. 자기 집의 사진첩이 아니라 위대한 수령님의 회고록에 자리잡은 남편의 모습은 부인에게 무엇인가 절절히 부탁하는듯싶었다.

깊고깊은 생각끝에 아들을 불러앉힌 부인은 김일성주석님을 찾아가 만나뵙고 너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고마움의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결연히 말하고는 주체82(1993)년 4월초 아들과 함께 조국방문의 길에 올랐다.

고령에 먼길을 떠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남편이 그렇게도 가고싶어했던 조국인데 어찌 늙었다고 주저할수 있겠는가. 이것이 부인의 심정이였다.

4월 10일 평양비행장(당시)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들 모자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비행기 승강대를 내리자마자 불현듯 《어머니!》 하는 부름소리에 이어 장년의 사나이 둘이 달려와 부인의 팔을 부여잡았던것이다.

《어머니, 제 경주입니다.》, 《제가 동주입니다.》.

한참만에야 반백이 넘은 그들의 얼굴에서 40여년전 조국해방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아들들의 모습을 알아본 부인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들은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들이였지만 열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를 잃은 그애들을 부인이 맡아 근 10년동안 길렀던것이다. 더우기 전쟁이 승리하는 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씩씩하게 뜨락을 나서던 아들형제의 모습은 지난 수십년세월 부인의 눈앞에 때없이 떠오르군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기들을 찾으시여 조국에 오는 어머니를 마중하게 해주시였다는 말을 들으며 부인은 《그랬구나. 내 주석님의 회고록을 보구 죽기 전에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싶어서 대양을 건너왔는데 이렇게 갈라졌던 혈육의 정까지 이어주셨구나.》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에 감사의 인사를 올리려고 찾아온 부인의 걸음은 결국 그이의 더 큰 보살피심을 받는 기회로 되였다.

4월 21일은 그들 모자가 조국에 온지 열하루째 되는 날이였다.

이날 11시에 그들은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최일천의 유해를 안장하는 의식에 참가하였다.

웃면이 둥그스름한 흰 화강석비돌에는 이런 글발이 씌여있었다.

최일천동지

반일애국렬사

1905년 10월 11일생

1950년 11월 5일 희생

그앞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보내주신 화환이 놓여있었다.

오랜 세월 위대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이 땅에 그의 혼이라도 불러다 잠재우고싶었던 부인은 나라를 위해 큰 공적을 세운 사람들만 오른다는 애국렬사릉의 높은 언덕에 남편의 묘소를 정하게 해주시고 자신을 대신하여 부어달라고 술까지 보내시였다는 이야기까지 듣고는 남편의 묘비를 그러안으며 흐느껴울었다.

이튿날에는 더 큰 감격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그들을 불러주시였던것이다.

그들 일행이 금수산의사당(당시)에 도착하였을 때 홀에서 기다리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큰절을 올린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부인의 두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다고,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이어 그들 온 가족과 함께 그리고 한사람씩 따로따로 자신의 곁에 세우시고 기념사진을 찍어주시고 그들 가족과 자리를 같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가자시절의 최일천과 여러 사람들에 대하여 감회깊은 추억을 회상하시고나서 곁에 앉은 부인에게 어머니, 조국에 오니 어떠한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온 세상이 우러르는 위대하신분이 평범한 늙은이에게 어머니라고 불러주며 정중히 경어를 쓰시는데 감격한 부인은 몸둘바를 몰라하다가 겨우 말을 떼였다.

《주석님, 감개무량합니다.

아이들과 헤여진지 43년이 되였습니다. 주석님덕분에 온 가족이 다시 만났습니다.

주석님. 지금까지 남편의 령혼이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는데 이번에 애국렬사릉에 안장시켜주시니 저는 너무나 감사해서 잠을 못잤습니다. 이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국에 와보니 모두들 주석님을 하느님처럼 모시고 받드는데 해외에서도 주석님을 그렇게 받들고있습니다. 부디 장수하십시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맙다고 하시면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시다가 최일천은 내가 처음 조직한 《ㅌ.ㄷ》성원이고 반제청년동맹원, 공산주의청년동맹원이였다고, 그는 똑똑하고 글도 잘 썼다고, 그래서 장춘에 나가 신문사일을 하라고 과업을 주었는데 우리를 위해 글도 쓰고 많은 일을 하였다고 뜨겁게 회억해주시였다.

세상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수많이 전해지고있다. 그러나 혁명전사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처럼 세월의 흐름을 초월하는 그처럼 진실하고 영원한 사랑은 찾아볼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