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우리
그 감동깊은 일화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느라면 우리
그 일화들중에는
주체81(1992)년 말 어느날 최일천의 부인과 아들이 살고있는 미국 오리곤주 포틀런드시의 어느한 집에는 자자손손 물려주어야 할 귀중한 가보가 생기였다. 그 가보는 선친들이 넘겨준 값진 유물이 아니라 다름아닌
그날 아들이 가져온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한장한장 번져나가던 부인은 회고록의 앞부분에 있는 사진자료들중에서 뜻밖에도 남편의 력작인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보게 되였다.
부인은 책이 발행된지 반세기가 되여오는 때에
감회에 젖어 회고록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앞에 이번에는 주석님께서 쓰신 다음과 같은 글발이 비쳐들었다.
《그때 우리가 추켜들었던 타도제국주의동맹의 리념이나 기개에 대하여서는 해방직후 최일천(최형우)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ㅌ.ㄷ〉와
그이께서는 아버님의 친지인 오동진의 집에서 있은 남편과의 첫 상봉에 대하여 그리고 오가자마을을 혁명화하시는 나날에 그와의 교분관계가 두터워진데 대하여 인상깊게 추억해주시였다. 더우기 회고록 제2권에는 남편의 젊은 시절 사진까지 실려있었다.
(주석님께서 우리 령감을 잊지 않고계시였구나. 주석님의 마음속에 령감이 아직도 살아있었어.)
깊고깊은 생각끝에 아들을 불러앉힌 부인은
고령에 먼길을 떠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남편이 그렇게도 가고싶어했던 조국인데 어찌 늙었다고 주저할수 있겠는가. 이것이 부인의 심정이였다.
4월 10일 평양비행장(당시)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들 모자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비행기 승강대를 내리자마자 불현듯 《어머니!》 하는 부름소리에 이어 장년의 사나이 둘이 달려와 부인의 팔을 부여잡았던것이다.
《어머니, 제 경주입니다.》, 《제가 동주입니다.》.
한참만에야 반백이 넘은 그들의 얼굴에서 40여년전 조국해방전쟁때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아들들의 모습을 알아본 부인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들은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들이였지만 열살도 되기 전에 어머니를 잃은 그애들을 부인이 맡아 근 10년동안 길렀던것이다. 더우기 전쟁이 승리하는 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씩씩하게 뜨락을 나서던 아들형제의 모습은 지난 수십년세월 부인의 눈앞에 때없이 떠오르군 하였다.
4월 21일은 그들 모자가 조국에 온지 열하루째 되는 날이였다.
이날 11시에 그들은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최일천의 유해를 안장하는 의식에 참가하였다.
웃면이 둥그스름한 흰 화강석비돌에는 이런 글발이 씌여있었다.
최일천동지
반일애국렬사
1905년 10월 11일생
1950년 11월 5일 희생
그앞에는
오랜 세월
이튿날에는 더 큰 감격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들 일행이 금수산의사당(당시)에 도착하였을 때 홀에서 기다리고계시던
이어 그들 온 가족과 함께 그리고 한사람씩 따로따로 자신의 곁에 세우시고 기념사진을 찍어주시고 그들 가족과 자리를 같이하신
온 세상이 우러르는 위대하신분이 평범한 늙은이에게 어머니라고 불러주며 정중히 경어를 쓰시는데 감격한 부인은 몸둘바를 몰라하다가 겨우 말을 떼였다.
《주석님, 감개무량합니다.
아이들과 헤여진지 43년이 되였습니다. 주석님덕분에 온 가족이 다시 만났습니다.
주석님. 지금까지 남편의 령혼이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는데 이번에 애국렬사릉에 안장시켜주시니 저는 너무나 감사해서 잠을 못잤습니다. 이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국에 와보니 모두들 주석님을 하느님처럼 모시고 받드는데 해외에서도 주석님을 그렇게 받들고있습니다. 부디 장수하십시오.》
세상에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수많이 전해지고있다. 그러나 혁명전사들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