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려시기의 안화사에 대하여

 2017.10.2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는 문화 유적과 유물이 많은 나라입니다.》 (김일성전집》 제10권 266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교시하신바와 같이 우리 나라는 문화유적과 유물이 많은 나라이다.

우리 인민이 이룩해놓은 유적가운데는 현재까지 존재하고있거나 이미전에 존재하였던 불교사원도 있다.

불교사상을 봉건통치의 사상적수단으로 내세운 고려봉건국가는 불교를 장려하면서 전국도처에 수많은 사원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사원들은 농민들과 수공업자들에 대한 물질적수탈과 가혹한 부역로동에 의하여 건설되였지만 그것들은 당시 인민들의 뛰여난 건축술과 예술적기교, 생활풍속과 정신세계 등이 깃들어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중의 하나로 된다.

고려사원들중에는 단청과 건축술로 이름을 떨친 안화사도 있다.

민족고전 《고려사》의 기록에는 고려봉건왕조의 건립자였던 왕건이 국토통일에 이바지한 자기의 4촌동생 왕신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안화선원을 건설하였다는 자료가 있다.

국토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왕건은 925년 10월에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조물군지역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교전하게 되였다.

이때 고려 장수 유금필이가 거느린 군사들이 왕건의 군사들과 합세하자 싸움에서의 패배를 간파한 견훤은 급기야 왕건에게 화친을 요청하면서 그 담보로 자기의 사위 진호를 고려에 보내왔다.

견훤의 요구에 대한 례의로 왕건 역시 자기의 4촌동생인 왕신을 후백제에 보내였다.

926년 4월에 고려에 인질로 보낸 견훤의 사위 진호가 그만 병으로 죽게 되자 왕건은 관리를 시켜 진호의 시체를 후백제에 보내주었다.

자기 사위의 시체를 넘겨받은 견훤은 고려가 진호를 의도적으로 죽였다고 하면서 후백제에 와있는 왕건의 4촌동생 왕신을 살해하였다.

927년 봄에 왕건은 왕신의 동생 왕육을 시켜 후백제에서 살해된 왕신의 시체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건은 왕신이 국토통일의 대업에 한목숨 바친것을 잊을수 없어 930년 8월에 안화선원을 세우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때 세운 안화선원은 후기에 세운 안화사의 전신으로서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절에 불과하였다.

930년으로부터 187년이 지난 1117년에 안화선원에 대한 중수공사를 진행하여 1118년 4월에 준공식을 요란하게 거행하였다.

이때 안화선원은 안화사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이에 대하여 민족고전 《고려사》에서는 왕의 참가밑에 락성식이 5일동안 진행되였는데 안화사에로 가는 길옆에는 장막들이 길게 잇닿아있고 악공들과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기록하였다.

지형상 절묘한 곳에 자리잡고있는 안화사는 그 경치 또한 절경이였다. 안화사로 가는 길량옆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나무숲이 무성하여 마치도 수만개의 창이 빼곡이 솟은듯 하였고 징을 울리는듯, 구슬이 부딪치는듯한 시내물소리로 산골짜기를 뒤흔들었다고 한다.

민족고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안화사문을 나서면 사방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하늘을 찌를듯 솟아있어 무더운 여름철에도 초가을과 같았으며 행인들은 그림으로 장식한 병풍속에 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

기묘한 지역에 자리잡은 안화사는 여러 정자와 전각, 당집과 대문을 가진 사원으로서 930년에 세운 안화선원보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예술적기교에 있어서 월등하였다.

정자로서는 청헌정, 련의정, 랭천정, 안화천정이 있었고 전각들로는 무량수전, 능인전, 미타당전, 인수전 등과 양화각, 중화각, 제운각 등이 있었다.

당집으로는 향적당, 선법당이 있었고 대문들로는 안화문, 자취문, 신호문, 신한문, 선법문, 효사문, 응상문, 향복문 등이 있었다.

불상으로는 제석상이 있었다.

이밖에 조사와 지장보살을 그린 화상이 있으며 관세음보살, 약사부처가 보관되여있었다.

비교적 좁은 골짜기에 자리잡고있던 안화선원을 안화사로 중수하는데 맞게 토기나 목재와 같은 재료를 쓰지 않고 자연지리적특성에 맞게 천연암석을 화분으로 리용하여 화초와 대나무를 심어놓았다.

이에 대하여 송나라의 봉건관리 서긍은 도서 《고려도경》에서 《화초와 대나무를 기이한 바위에 심어놓고 즐겁게 휴식하면서 감상하도록 하였으니 특별히 토기나 나무로 장식할 필요가 없었다.》고 서술하였다.

안화사의 예술적기교를 보장하기 위하여 고려봉건정부에서는 인적로력과 물질적자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였다.

하기에 민족고전 《고려사》에는 《안화사건설초기에 건설을 감독하는 왕의 측근신하들이 건물을 화려하게 꾸리는데 치중하다보니 그 로력과 자금을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이 자료는 당시 안화사중수공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였으며 인민의 고혈이 깃든 자금들이 얼마나 수많이 탕진되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준다.

안화사는 여러가지 색갈의 단청을 가지고 고상한 건축미를 더욱 부각시킨것으로 하여 당시까지 존재해오던 고려의 사원들중에서 첫자리를 차지하였다.

하기에 리인로(1152~1220)는 민족고전 《파한집》에서 《안화사의 단청과 건축구조는 우리 나라에서 으뜸이다.》라고 서술하였다.

고려의 건축예술을 보여주는 안화사가 현존하지 않지만 이 자료를 통하여 당시 안화사의 건축물이 상당히 우수하였을뿐아니라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는것을 알수 있다.

1123년에 송나라의 사신 로윤적과 함께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의 봉건관리 서긍은 자기가 쓴 도서 《고려도경》에서 《안화사의 풍경이 화려하여 마치 병풍이나 휘장과도 같다.》고 감탄하였다.

안화사가 건설된 12세기로 말하면 고려에서 풍경화의 사실주의적발전이 최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

고려의 회화기술이 얼마나 발전하였던지 고려의 궁정화가이며 도화서의 책임자였던 리녕이 1124년 7월에 사신 리자덕을 따라 송나라에 갔을 때 송나라왕 휘종은 한림원 대소에게 명령하여 송나라화가들인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 등으로 하여금 리녕에게서 화법을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리녕은 휘종의 요청에 따라 풍경화 《례성강도》를 그려주었는데 휘종은 크게 찬탄하면서 이때까지 많은 화가들이 사신과 같이 송나라에 왔지만 리녕만큼 기묘하고 뛰여난 솜씨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고 하면서 술과 음식 그리고 여러가지 비단을 주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주체57(1968)년 8월 22일 개성지구 력사문화유적들을 돌아보시면서 일군들과 한 담화 《개성지구 력사문화유적유물들을 원상대로 잘 보존관리할데 대하여》에서 고려시기에 우리 인민들은 건축술이 높았을뿐아니라 다양한 색갈로 단청도 잘하였다고 교시하시였다.

고려인민들이 당시의 발전된 회화기술로 안화사의 단청을 조화롭게 한것으로 하여 안화사는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이에 대하여 송나라의 봉건관리 서긍은 1123년 고려의 수도 개경(오늘의 개성)에 와서 체류기간 목격한 사실들을 적어 1124년에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로 하여 안화사는 광통보제사, 흥국사, 국청사, 흥왕사와 함께 송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고려봉건왕조에서는 1067년에 불교사원으로 흥왕사를 건설하였는데 이 사원은 규모가 방대하고 금탑을 가진것으로 하여 다른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한편 1118년에 건설된 안화사는 훌륭한 단청기술과 뛰여난 건축기교로 하여 이웃나라에 전하여졌다.

고려인민들의 슬기와 재능이 다분히 어려있던 안화사는 고려말에 화재를 당하여 없어진것으로 보고있다.

안화사에 대한 이상의 력사자료들을 통하여 고려시기의 건축, 조각, 미술, 공예의 발전면모를 알수 있다.

이처럼 1118년에 건설된 안화사는 불교관계의 건축물이긴 하지만 고려인민들의 창조적지혜와 뛰여난 재능이 깃들어있는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 력사기록에 뚜렷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