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있는 력사유적유물들을 더 많이 발굴하여 민족문화유산의 보물고를 풍부히 해나가야 합니다.》
돌바둑판쪼각들은 흰색의 비교적 무른 고령석을 가공하여 만든 돌판에 가로세로 선을 그어 격자칸을 형성한것인데 모두 17점이다.
제일 큰 쪼각에는 격자선의 사귐점 3개당 1개의 원이 새겨졌는데 현재 2개가 련이어 있다. 이 원들의 전후좌우에 다 선이 2줄씩 있고 그 다음에도 공간이 있어 더 연장되여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 쪼각의 길이는 36cm이고 너비는 20cm이며 두께는 3cm이다. 네모난 칸의 크기는 가로 3.8cm, 세로 3.9cm 이며 원의 직경은 1.1cm이다. 나머지쪼각들가운데는 첫번째쪼각의 량옆에 붙여서 복원되는것들도 있다.
이 돌판쪼각들에서 3개의 사귐점당 1개씩 있는 원의 배치상태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것으로 인정되는 바둑판(조선민속박물관 소장)의 화점(옛날 바둑을 시작할 때 바둑알을 놓던 점)과 같다.
돌바둑판쪼각 3개를 련결하여 보면 3개의 화점이 련이어 있고 그 다음에도 2개가 더 있은것으로 인정되므로 복원하면 화점이 총 5개가 있고 한변의 길이가 72cm, 너비가 68.4cm정도인 19줄 바둑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이것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바둑판과 같은 형식이므로 고구려의 바둑판이 고려를 거쳐 조선봉건왕조시기까지 계속 이어져왔다는것을 보여준다.
* 이 바둑판쪼각들가운데서 하나는 변두리부분에 해당하는데 세로방향의 줄이 끝까지 연장되여있으므로 변두리가 곧 첫번째줄에 해당한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 바둑판의 년대는 우물에서 같이 나온 고구려기와쪼각들과 나무유물들의 년대를 해명하는 방법으로 알수 있다.
기와는 붉은색의 암기와쪼각들인데 노끈무늬는 없고 격자무늬가 대부분이며 일부 격자무늬우에 전나무잎무늬를 덧새긴것들도 있다. 이런 무늬는 고구려암기와의 무늬변천에서 대체로 6세기말~7세기초경으로 보고있다.
우물안에서 나온 나무유물을 가속기질량분석(AMS)법에 의하여 절대년대를 측정한데 의하면 583~656년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이것은 고고학적으로 밝힌 시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그러므로 이 고구려돌바둑판의 년대는 6세기말이나 7세기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수 있다.
우물에서 나온 고구려바둑판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19줄 바둑판이다.
중국에서 바둑판의 발전과정을 보면 한나라시기에는 15줄, 위(220-265년)나라시기부터는 17줄, 수-당나라시기에는 19줄 바둑판으로 변천되였다.
중국의 19줄 바둑판자료가운데서 가장 오랜 유물은 1959년에 하남성 안양시에서 발굴된 수나라 장성무덤의 자기바둑판모형인데 한변의 길이가 10.2cm정도 되는 정방형이고 높이는 4cm이며 년대는 6세기말이다.
이것은 고구려와 중국 수나라에서 19줄짜리 바둑판의 사용시기가 같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바둑판은 구체적인 형식에서 중국 수나라의 바둑판과 명백히 차이난다.
중국의 한나라로부터 송나라시기의 바둑판들을 보면 화점이 한줄에 2개씩(네모서리에 한개씩)이다.
이것은 화점이 한줄에 5개씩 있는 고구려의 바둑판과 중국의 력대바둑판들이 서로 다른 계통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고구려시기 바둑판이 이처럼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할수 있은것은 당시 바둑이 매우 성행하였던것과 관련된다.
문헌기록에는 고구려의 중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에게서 국수로 인정받았다고 되여있다.
또한 고구려사람들이 다른 놀이와 함께 바둑을 즐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에서 왜땅에 간 바둑판이 17줄짜리이라고 한다.
새로 발견된 고구려의 바둑판은 우리 나라의 력사발전에서 고구려가 논 역할과 고구려문화의 우수성, 독자성을 보여주는 조선민족의 귀중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