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전영일
2017.7.5.
오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직접적인 발기와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눈부시게 일떠선 21세기 사회주의문명의 리상거리, 려명거리의 현대적인 살림집들에 김일성종합대학의 평범한 교원, 연구사들이 보금자리를 펴고있는 소식은 온 나라와 온 행성을 무한히 격동시키고있다.
이 희한한 현실을 보면서 새 조국건설시기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들의 살림집문제부터 해결하여주시던 어버이수령님의 태양의 모습이 어려와 우리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하여주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나라의 형편이 어렵지만 종합대학을 창립하고 대학교원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중요한 국가적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김일성전집》 제9권 187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새 조국건설을 위하여 그처럼 어려운속에서도 김일성종합대학 교원, 학자들의 살림집문제를 위하여 온갖 뜨거운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생활을 하루빨리 안착시키고 필요한 생활조건을 마련해주는것은 교원, 학자들이 자기의 본신임무에 전심전력할수 있게 하는데서 나서는 절박한 문제의 하나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35(1946)년 12월 1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교원, 학자들에게 크나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날 교원들의 생활형편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합대학 교원들은 나라의 민족간부를 키워내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있는것만큼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것은 아끼지 말고 다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특히 한국괴뢰지역에서 들어온 교원, 학자들의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대부분은 가장집물도 못 가지고 맨몸으로 들어왔으며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여 그들의 생활을 특별히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계속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합대학교원들의 생활을 빨리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들을 밝혀주시고 실제적인 대책들을 하나하나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워주신 새로운 조치에 따라 당과 국가에서는 평양시에 있는 좋은 살림집들을 우선적으로 종합대학 교원, 학자들에게 내주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시에서 가장 크고 잘 꾸려진 대동강기슭의 2층살림집(오늘의 중구역 오탄동)은 교원, 학자들의 집으로 배정되였다.
이 집들에는 방마다 전기온돌이 놓여있고 전열기와 가스난로로 밥을 짓게 되여있는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집이였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해방직후의 그처럼 어려운 시기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 학자들에게 돌려주신 특별한 우대조치의 하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37(1948)년 8월 10일 새 교사건설이 끝나는 차례로 경치아름다운 청암리지역에 아담한 교원주택들을 지어주도록 크나큰 은정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청암리일대는 좌우로 대성산과 경치수려한 모란봉을 끼고있고 앞에는 대동강의 맑은 물이 흐르고있어 산천경개가 이루 말할수 없이 아름다운 곳일뿐아니라 새로 건설하는 본교사건물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교원주택지구로는 여러모로 안성맞춤한 지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경치아름다운 청암리일대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살림집터전을 몸소 잡아주시고 여러차례에 걸쳐 건설현장에 나오시여 구체적인 지도를 주시였으며 교원, 학자들의 새집들이까지 봐주시였다.
주체38(1949)년 1월 15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와 함께 대소한의 추위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청암리주택건설장에 나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길옆에는 돌을 쌓고 현관앞에는 계단을 만들며 어느 방은 침실로 쓰고 어느 방은 서재로 쓰라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살림집앞마당에 꽃밭을 만들 자리까지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이 지대는 경치가 좋고 조용하며 또 방에 해가 잘 들어서 좋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이 일대에 교원, 학자들의 살림집을 더 많이 지어줄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교원살림집건설정형에 대하여 자주 알아보시고 필요한 모든 자재와 설비들을 우선적으로 보내주시였으며 주체38(1949)년 4월 24일에는 완공된 교원주택들을 돌아보시면서 새집들이를 하는 교원, 학자들을 축하해주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태양의 품이 있었기에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원, 학자들은 그처럼 어려운 건국의 시기에도 온갖 조건이 다 갖추어져있는 훌륭한 살림집을 리용할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평범한 교원, 학자들이 누린 행복은 인민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멸사복무의 헌신과 사랑이 안아온 이민위천의 결정체였다.
해방후부터 늘 너무나도 소박한 저택에서 생활해오신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해방직후 여러 항일혁명투사동지들과 함께 지내시던 합숙방과 해방산기슭의 자그마한 단층집, 전후의 눅눅한 반토굴집과 세차례나 설계를 축소하고 또 축소하게 하여 지으신 소박한 저택에 깃든 이야기들은 어려운 나라형편에서 누구나 좋은 집들을 쓰고살지 못하는 인민들의 생활형편부터 먼저 생각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인민관이 낳은 감동적인것이였다.
주체73(1984)년 12월초 어느날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택이 지은지 오래되고 작아서 다시 꾸렸으면 좋겠다고 간청을 드리는 일군들에게 우리 인민들이 아직도 다 좋은 집을 쓰고살지 못하고있는데 내가 우리 집을 다시 지으면 인민들의 집을 지을 자재를 더 쓰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시며 다시는 그런 제의를 하지 않기로 하자고 다짐을 받으시였다고 한다.
어버이수령님의 그 사랑을 그대로 지니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초강도강행군길을 이어가시는 속에서도 자신의 수첩에 종합대학살림집이라는 글을 써넣으시고 거기에 몇번이나 동그라미를 그어가시며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살림집문제를 두고 크나큰 심혈을 기울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우리 대학의 교육자들에게 안겨주시던 크나큰 사랑은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에 의하여 줄기차게 이어져 주체102(2013)년 뜻깊은 당창건기념일을 맞으며 해솟는 룡남산이 바라보이는 룡흥네거리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살림집이 우뚝 솟아올랐고 오늘은 새 세기 문명이 응축된 거리, 려명거리가 일떠서게 되였던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