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어버이수령님의 품은 사람들이 애국자로서의 삶을 빛내일수 있게 하는 영생의 품

 2019.6.15.

오늘 우리 인민은 김일성민족, 태양민족의 한 성원으로서의 존엄과 긍지를 가슴에 안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두리에 철통같이 뭉쳐 이 땅우에 인민의 모든 꿈과 리상이 꽃펴나는 천하제일강국을 일떠세우기 위한 장엄한 대진군길을 힘차게 다그쳐나가고있다.

세계의 수많은 나라 인민들이 부러움과 찬탄속에서 우러러 바라보는 우리 인민의 존엄과 긍지는 전체 조선민족의 운명의 구세주이시고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신 어버이수령님을 높이 모신데로부터 지니게 된 존엄과 긍지이다.

돌이켜보면 사대와 망국으로 세계지도에서 빛마저 잃었던 우리 조선을 세계에서 가장 존엄있고 강위력한 나라로, 우리 민족, 우리 인민을 세상에서 가장 긍지높고 행복한 인민으로 내세워주신분은 다름아닌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우리 수령님의 그 품속에서 해방전 짐승보다 못한 천대와 멸시를 받던 어제날의 머슴군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로력영웅으로 성장하였으며 반공의 길에서 한생을 어지럽게 살아온 반공투사가 인생말년에 애국의 길을 걸으며 영생의 언덕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는 영광도 지니게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한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도 인생말년에 련공으로 인생전환을 하여 애국의 길에 나섰고 최덕신과 같은 민족주의자도 수령님의 품에 안겨 애국자로서의 삶을 빛내일수 있었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1권 161페지)

우리 민족, 우리 인민이라면 그 누구나 할것없이 수령님의 품속에서만 태양민족의 존엄높은 긍지와 자랑을 지니고 행복한 삶을 누릴수 있었다.

장구한 우리 혁명의 자랑차면서도 간고한 투쟁의 력사에는 일찍부터 수령님을 따라 혁명의 길에 나선 김혁, 차광수와 같은 청년공산주의자들뿐아니라 김구, 최덕신과 같은 반공분자, 민족주의자도 있었으며 김정부와 같은 지주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 수령님의 회고록에 나오는 김구나 최덕신, 김정부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김완우와 같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여기에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대지주의 아들이 유명한 성악가가 된 가슴뜨거운 이야기가 있다.

해방을 맞이하고 새조국건설에 들어선 우리 나라에는 나라를 떠메고나갈 인재가 부족하였다. 어디서나 요구되는것이 인재였지만 그 어디에나 고갈되다싶이한것 역시 인재였다. 다른 시기와 비할바없이 인재가 그토록 귀중한 때였지만 일군들은 인재라고 할수 있는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하고있었다. 그것은 인재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대체로 부유한 가정출신으로서 가정주위환경이 복잡한 사정과 관련되였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국립교향악단을 조직할 때에도 바로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국립교향악단을 조직할 과업을 받은 한 일군은 난관에 부닥쳐 일을 전개하지 못하고있었다. 그것은 국립교향악단대렬을 어떻게 꾸려야 할지 도무지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교향악단을 꾸리자면 전문음악교육을 받고 음악에 대하여 잘 아는 인재들이 있어야 하겠는데 혁명투쟁에 참가하였던 사람들가운데는 음악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 별반 없었다. 그런데 자산계급출신의 자녀들속에는 음악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교향악단을 조직할 과업을 받았던 책임일군은 그의 사업정형에 대하여 물으시는 수령님께 음악을 잘 아는 적절한 사람들을 찾아내지 못하여 아직까지 교향악단을 조직하지 못하고있는 안타까운 사정을 말씀드리였다. 그러면서 김완우라고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있고 지휘할줄 아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의 아버지들이 지주나 목사들이여서 어떻게 하였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자기의 심정을 수령님께 솔직히 털어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계시다가 그 일군의 가슴속에 실린 온갖 시름을 덜어주시려는듯 환하게 웃으시며 그들의 아버지들이 지주였거나 목사를 하였으면 하였지 본인들이야 지주도 아니고 목사를 한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하시면서 그들을 교향악단에 받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한없이 넓고 따뜻한 사랑의 한품에 안긴 김완우는 그후 유명한 성악배우로 자라나 세계무대에서 조국의 영예를 떨치였다. 그는 주체37(1948)년에 쏘련에 가서 노래를 잘 불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가서도 영웅조선의 가수답게 명성을 떨쳐 상까지 받았다.

주체82(1993)년 9월말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단군릉을 돌아보시면서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단군말살책동으로부터 단군릉을 지켜내기 위하여 단군릉수호회를 조직하고 돈을 모아 릉을 꾸리고 기적비도 세웠다고 하는데 그때 단군릉수호회 회장이였던 김상준이 대지주였지만 애국자라고 볼수 있다고, 대지주라고 하여 다 친일파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그가 대지주였지만 단군릉을 꾸린것을 보면 조선민족의 넋이 살아있었던것 같다고, 일제시기 그가 돈을 모아가지고 단군릉을 이만한 정도로 꾸려놓은것은 괜찮다고 회상하시였다.

김상준은 바로 김완우의 아버지였으며 단군릉에 있는 기적비는 일제시기인 1936년에 김상준이 주동이 되여 세운것이였다.

이렇게 되여 대지주였던 김상준은 애국자로, 대지주의 아들이였던 유명한 조선의 성악배우 김완우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신 애국자의 아들로 높이 평가되게 되였다. 아버지도 아들도 다 어버이수령님의 바다같이 웅심깊은 사랑속에서 자기 조국의 애국자로, 새 조선의 유명한 성악배우로 다시 태여났으니 그 빛나는 삶의 높이는 얼마나 높은것인가.

우리 수령님은 바로 이런분이시였다. 그가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든 한품에 안아 어머니가 아기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주듯 타이르고 깨우치고 내세워주시며 삶의 새 언덕에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세워주신 우리 인민모두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