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우진호와 《농민생활도》

 2016.5.12.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선조들은 그림을 아주 잘 그렸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가운데는 걸작이 많습니다.》 (《김정일전집》 제4권 391페지)

우리 나라 회화사의 갈피에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민간출신의 화가 우진호도 있다.

그는 개성의 《구리개싸전》의 미곡점에서 일생 쌀되는 일을 맡아하던 막벌이군인 아버지 우환규의 둘째아들로 1832년에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우진호는 자를 양수, 호를 송파라고 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미곡점에서 쌀을 나르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늘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처지와 생활환경속에서도 우진호는 남달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구를 가진 힘장사로 이름을 날려 1884년에는 《별선군관》으로 뽑혀 수도 한성의 궁궐을 지키는 하급군인으로 복무하였다. 그후 군대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와서 그림을 그리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1894년경에 경상도 고성에 살고있던 아들집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진호는 평민출신의 민간화가로서 당시 우리 인민들의 생활세태를 보여주는 그림들을 잘 그렸을뿐아니라 풍경화와 화조화 등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옛 기록에 우진호를 가리켜 《그림을 잘 그린 화가로서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하였으며 《젊어서 수렵(사냥)도나 인물화를 많이 그리였는데 이런 그림들을 집에 얼마나 많이 그려놓았던지 동네 처녀들이 그 집에 그림을 보러 밀려갔다.》고 하였으며 또 《산수화나 화조화도 다 잘 그리였으며 개성의 <표충비>각의 퇴색한 단청도 그가 그린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통하여 우진호는 수요자들의 요구에 따라 인물화나 풍경화, 화조화, 수렵도 등 막히는데가 없이 그림을 잘 그린 화가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특히 그는 당시 농촌의 현실생활을 비판적안목을 가지고 사실주의적으로 잘 그렸다. 그는 당시 전문화가들도 그려내기 힘든 병풍형식에 인민들의 각이한 년중생활을 농촌의 환경과 어울리게 그려냈다.

그가 고향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하는것은 자기의 호를 개성을 의미하는 《송도》와 자기 마을 《반송》에서 반송골을 의미하는 《파》자와 결합하여 《송파》라고 한데서 잘 나타나 있다. 이와 함께 《송파》라고 한데는 사시절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개성의 자연풍경을 의미하는것으로도 되여있었다.

고향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그의 그림에서 표현된 특유한 자연풍경과 인물, 지어는 아담하게 꾸려진 초가집담장에 이르기까지 농촌의 특색을 그대로 표현하고있는데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된 10폭병풍의 《농민생활도》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그림은 년중에 근로하는 농민들이 진행하는 로동생활과 세태풍속을 량반지주와의 판이한 생활대비속에서 진실하게 묘사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우진호의 10폭병풍그림 《농민생활도》를 보시면서 그때 화가들은 벌써 사회계급관계를 명백히 그려놓았다고 평가해주시였다.

우진호의 《농민생활도》에는 우선 당시 불합리한 사회현실이 계급적대립관계속에서 진실하게 형상되여있다.

우진호는 직업적인 《도화서》화원은 아니였으나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민간화가로서 착취계급의 성격과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근로하는 농민들에 대한 동정을 대조되는 생활속에서 생동하게 형상하였다.

병풍그림들의 매 화폭의 웃부분에는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지주들의 라태하고 방탕한 생활을 비판적으로 생동하게 형상하였다. 특히 량반지주들의 무위도식하는 장면과 한가하게 시나 부르고 거문고를 타는 모습 등을 한 화면속에 인민들의 로동생활과 대조되게 배치한것은 전시기보다 불합리한 사회계급관계를 더욱 폭넓게 보여준것으로 된다.

우진호의 《농민생활도》에는 또한 그 어떤 틀에도 구애되지 않고 인민들의 모습이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형상되여있다.

그림은 각이한 계층들의 생활을 련속되는 형상적흐름속에서도 중심인물들은 근로하는 사람들이라는것을 실지 인민들의 로동생활모습과 결부하여 실감있게 보여주고있다.

실례로 김매기 장면에서 오뉴월 삼복더위속에 김매는 농민들의 로동생활을 중심으로 그리면서도 다른쪽에서는 점심을 이고 오는 녀인들과 아이들의 모습을 형상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 농촌의 김매기철에 그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것이였다. 또한 다른 그림들에 그려진 걸싸게 일하는 건장한 체구를 가진 농민들의 형상에는 한결같이 겸손하고 근로정신으로 일관된 소박한 내면세계가 잘 엿보이고있다.

이처럼 그림 《농민생활도》는 인민들의 생활과 대조되는 지배계급의 내면세계와 대치시킴으로써 인민들에 대한 동정과 착취계급에 대한 비판이 뚜렷이 안겨오게 형상하였다.

물론 우진호의 《농민생활도》에는 당시 사회적으로 농민들을 가혹하게 억압, 착취하는 량반지주들을 반대하여 손에 몽둥이나 도끼를 들고 그들을 때려눕히는 농민들의 폭력투쟁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제한성도 있다.

이것은 당시 민간화가로서 우진호가 가지고있던 시대적 및 사상적 제한성과 적지 않게 관련되여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진호는 당시 불평등한 사회현실과 계급적대립관계, 농민들의 생활을 진실하게 생동하게 형상함으로써 비판적인 사실주의에로의 길을 열어놓는데서 적지 않은 기여를 한 민간화가로 그 이름을 남기였다.


농촌생활도(작 128*32.4cm)비단 담채 우진호
농촌생활도(작 128*32.4cm)비단 담채 우진호
농촌생활도(작 128*32.4cm)비단 담채 우진호
농촌생활도(작 128*32.4cm)비단 담채 우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