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령도자
《실학사상가들은 <실사구시>, <실용지학>을 주장하면서 뒤떨어진 우리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학문연구에 전심하였습니다.》(《
실학사상은 우리 나라 사회력사발전과 철학사발전의 합법칙적요구를 반영하여 17세기부터 하나의 사상조류로 형성되여 19세기 전반기까지의 오랜 기간 더욱 발전풍부화되면서 우리 나라 근대철학의 려명기를 개척한 진보적인 사상이다.
실학사상은 조선봉건왕조국가가 점차 붕괴되여가던 시기 봉건통치배들과 그 사상적통치수단이였던 유교성리학의 반동적학풍을 반대하고 《실사구시》, 《리용후생》의 구호밑에 자연과 사회현상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의 생활에 쓸모있는 학문(실용지학-실학)을 할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부터 그들은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사회적문제들과 우리 나라의 력사와 언어, 문학, 지리, 풍속을 깊이 연구하였을뿐아니라 천문학, 수학, 지리학, 의학, 농학 등 자연과학기술적문제들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데 주되는 관심을 돌리였다.
리규경은 우리 나라 봉건말기에 활동한 실학의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리규경(호는 오주, 1788~1863년)은 량반가문의 서자출신으로서 《4검서》로 알려진 실학자 리덕무(호는 아정, 1750~1793년)의 손자이다.
리규경은 가정적으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사회적으로는 실학자이며 고증학자로서 이름있던 김정희(호는 추사, 완당, 1786~1856년)에게서, 간접적으로는 실학자 박제가(호는 초정, 1750~1805년)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울러 김정희의 고증학을 학문연구에 받아들이였다. 또한 동시대인이며 철학가였던 최한기(호는 패동, 명남루, 1803~1879년)와 지리학자였던 김정호(호는 고산자, ?~1864년)와도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이것은 리규경의 활동과 학풍이 당대의 이름있는 실학의 연구자들과 직접 또는 간접적인 영향속에서 이루어졌다는것을 보여준다.
리규경의 실학적학풍은 선행한 실학자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특징을 나타내고있다.
리규경의 실학적학풍의 특징은 근대적인 학문에 대한 지향을 강하게 고조시키고있는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까지 기적적으로 전해지고있는 그의 책 《오주연문장전산고》(60권)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리규경이 근대화를 지향하는 혁신적인 안목으로 자연과 사회현상들을 투시하고 연구한 결과를 수록한 책이다.
이 책은 포괄내용이 방대하고 심오할뿐아니라 고루한 중세기적몽매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문명에로 나아가려는 저자의 지향을 담고있는것으로 하여 봉건말기 우리 나라 실학사상과 근대계몽사상의 호상관계를 연구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책의 제명에서 《오주》는 리규경의 별호이지만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오주》라는 단어에는 우선 리규경의 포부가 담겨져있다.
《오주》는 5대주의 략칭으로서 그것은 세계를 가리킨것이다. 다시말하여 그는 세계를 대상으로 학문을 널리 탐구하여 세계적인 범위로 학문의 폭을 넓히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있었다. 이러한 포부는 봉건통치의 유지를 주의로 삼던 봉건량반들의 목가적이며 고루한 견해와는 판이한 대조를 이루고있을뿐아니라 선행실학에서도 보기 드문것이다.
그는 수천여년이나 지속된 봉건적몽매의 질곡속에서 벗어나 세계의 푸른 하늘을 날으려는 갈망과 포부를 오주라는 말속에 담아 집약적으로 반영하였다.
《오주》라는 말속에는 또한 리규경의 지향이 담겨져있다.
그는 새것을 열렬히 지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새것이란 근대문명이였다. 그는 과학발전의 세계적인 추세에 맞게 자신을 포함한 우리 나라의 학문도 세계적인것으로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지향속에서 한생을 보내였다. 이로부터 그는 오주라는 말속에 불교적인 세계구분법으로서의 5주가 아니라 근대적인 5대륙이라는 의미를 담음으로써 새것에 대한 근대적지향을 표현하였다.
리규경은 《대지휘오주오대주구중제명호변증설》에서 근대적인 대륙구분법을 가장 우월한것으로 긍정하면서 불교적인 세계구분을 반대하였다.
이처럼 리규경의 책제명의 오주라는 말속에는 근대적인 새 세계를 탐구하고 연구하려는 그의 포부와 지향이 반영되여있다.
이밖에도 그의 책에 수록되여있는 1400여편의 《변증설》들에서도 구체적인 론증을 통하여 근대화에로의 지향을 강하게 나타내고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변증설들에 관통되고있는것은 근대과학기술의 성과와 그 연구방법이다.
리규경이 생존한 18세기말~19세기 60년대는 근대과학기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면서 세계적인 판도에서 보급되여가던 시기이다. 리규경은 우리 나라의 장래를 근대적인것으로 보았기때문에 자기 학문의 앞길도 근대과학기술에서 찾았으며 근대적인 방법과 기술만이 사물현상을 옳바로 투시할수 있는 수단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근대과학기술의 성과와 그 연구방법들을 자기 학문연구에 받아들이였으며 그가 연구분석한 결과들이 변증설의 이름으로 서술되게 되였다.
리규경은 변증설들에서 과학적인 분석적연구, 상세한 비교연구, 사물들사이의 련관적연구와 같은 근대적인 연구방법들을 널리 활용하여 자연과 사회의 여러 현상들의 본질을 깊이있게 론증하였다.
리규경은 이러한 근대지향적인 학풍에 기초하여 선행한 실학자들속에서 관망의 대상으로 되여있던 근대문명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연구분석함으로써 근대문명의 면모를 학술적으로 보여주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봉건사회는 급속히 붕괴되여가면서 사회적모순이 극도로 격화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유미자본주의렬강의 침략과 《통상》강요가 끈질기게 계속되였다.
이러한 사정은 봉건사회의 위기를 더욱 격화시켰을뿐아니라 봉건통치배들의 지위를 더욱 불안케 하였다.
부패무능이 낱낱이 드러난 봉건통치배들은 나라의 전도와 운명보다도 저들의 지배적지위를 보존하는데만 급급하면서 국내적으로는 새로운 사상, 《이단》에 대한 인신적, 리론적공제를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다른 나라들과의 일체 접촉과 왕래를 금지하는 보수적이고 페쇄적인 《쇄국》정책에 매달리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는 급속히 발전하는 세계와 멀리 뒤떨어져 《세계에서 가장 약하고 남달리 빈곤한 나라》의 운명에 처하였다.(《오주연문장전산고》32권, 여번박개시변증설)
봉건통치배들의 탄압과 당파싸움의 정치풍파속에서 1801년 《신유사옥》을 계기로 박제가, 정약용 등이 류배지에 쫓겨가지 않으면 안되였고 우수한 실학자 박지원이 보수적인 반대당파들속에서 박해의 대상으로 되였다.
선행한 18세기 실학사상가운데서 근대화를 선동한것은 《북학파》의 사상이였다. 홍대용(호는 담헌, 1731~1783년), 박지원(호는 연암, 1737~1805년)을 중심으로 하고 당파사이의 적대적장벽을 뚫고 정약용(호는 다산, 1762~1836년)도 참가하였던 《북학》론의 제창자들은 서양의 선진과학기술을 비롯하여 청나라에서도 실용적으로 쓰이고있는것들을 널리 받아들여 우리 나라의 생산과 과학기술을 빨리 발전시킬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음양학과 리기설에 구애되여 자연의 법칙을 살피지 않는것은 과거 유학자들의 잘못이다.》(《담헌서》내집 4권, 의산문답), 《우리 나라는 도구가 발전하지 못하여 남들이 하루에 하는 일을 우리는 한두달씩이나 걸려서 하니 시간을 잃고있다.》(《북학의》 재부론), 《기술은 사람들의 집단이 커질수록, 세대가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정교하게 더욱 발전되는것이다. 이것은 발전의 필수적추세이다.》(《여유당전서》1집 11권, 10페지)라고 하면서 농업과 상업, 무역, 화페, 류통, 수공업, 교통운수, 국방 등 사회적문제들과 천문학, 기상학, 지리학, 물리학, 건축학, 의학, 농학 등 자연과학과 기술적문제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것을 주장하였으며 선진과학과 기술들을 소개도 하고 일부 분야에서의 연구도 심화시키였다.
《북학》론의 이러한 지향은 종래 중세기적몽매와 편견에서 벗어나 나라의 발전을 세계적인 추세와 련관시켜보는 관점을 확립함으로써 실학사상을 근대적인 방향으로 접근시키고 주자학에 대한 맹목적인 교조에 매달리던 고루한 학풍을 정면에서 배격하였다는 점에서 진보적의의를 가지였다.
리규경은 실용적이며 근대적인것에 관심할것을 주장한 선행한 실학자들의 새로운 관점을 시인한데 기초하여 근대문명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원리화하고 학술적으로 해명하는데 전심하였다.
그의 책이 다방면적인 《변증설》의 형식으로 씌워진것은 바로 이러한 근대지향성과 관련되여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책의 서문에서 《<명물도수>에 대한 학문을 … 이단처럼 여기면서 덮어놓고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 학문이 우리 나라에 흘러들자 뜻있는 선비들은 온 마음으로 달라붙어 심오한 내용을 애써 파고들었지만 귀와 눈에 제한이 있는 탓에 겉만 흩을뿐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평소에는 대충 말을 하다가도 실지 적용하는데 접어들면 어리둥절하여지는통에 그 근원이 어데 있는지조차 리해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물으면 말을 하려다가도 못하거나 이런 소리 저런 소리나 하게 되니 애당초에 모르는것만 못한 일로 된다. <상수>에 대한 학문은 아무리 심오한 성인의 학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쉽게 말할수 있는것은 아니다. 나는 문장에만 뜻을 두고있는 터여서 이와 같이 유용한 학문에 대해서는 아주 깜깜이다. 그러므로 그 끄트머리는 아는것이 없지만 심리상으로는 아무튼 좋아하는 까닭에 여러해동안 책속에서 얻은것도 있고 마음속에 생각되는것도 있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리규경은 당시 량반사대부들이 덮어놓고 배척하면서 이단시하였을뿐아니라 《뜻있는 선비》들도 안목이 제한되고 지식이 부족하여 리해하지 못하는 근대적인 학문분야를 문제점으로 삼아 연구하였을뿐아니라 이러한 학문이 사회적진보에 이바지해야 한다는것을 절절히 강조하면서 책의 집필목적을 밝히고있다. 책제명에 있는 《연문》이란 《관심밖의 글》이라는 뜻인데 남들이 관심밖에 두고있는 그것이야말로 연구가치, 학술적가치가 있는 《유용한 학문》이라고 그는 인정하였다.
이로부터 그가 쓴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생활상에서 제기되는 구체적인 대상들에 대하여 1 417제목의 문제점을 설정하고 고심어린 탐구로 론증과 해석을 가한 백과사전형식의 책으로서 여기에는 생활에서 필요한 문제들이 포함되지 않는것이 거의 드물다.
이 책에 들어있는 류문별 내용만 보아도 기계, 기구, 도량형/곡종, 과수, 잠업, 목축, 농법/생리, 의술, 의학/동물, 식물/자연현상, 지리, 광물, 축산/수학, 물리/천문, 력산/철학, 종교, 한문, 고전해석/력사, 경제, 군사/어문학, 음악, 미술, 례식, 건축, 서적/민속 … 등이다.
리규경의 학문이 생활과 밀착되게 된것은 《실사구시》를 리념으로 하는 실학일반이 추구하는 목적에 기인되는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리규경의 사상적지향과 많이 관련되였다.
리규경은 당시의 사회형편과 자기의 계급적처지로부터 자기를 구원할수 있는 출로를 오직 학문탐구의 길에서 찾았으며 중세기적무지와 몽매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실생활에 대한 학술적리해를 가지는데 기초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하여 학문은 더욱 구체적인것으로 되였다.
당시 사회의 락후성이 경제생활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고있은데로부터 리규경은 사회적문제들과 함께 자연과학기술에 많은 힘을 기울여 그것을 해명하는것이 그러한 락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인정하였다.
이와 같이 근대자연과학기술분야에서의 성과들을 구체적인 항목밑에 소개, 해명, 론증함으로써 봉건적몽매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근대적진보를 이룩하기 위한 가능성과 전망을 실천적으로 현실적인것으로 보여주었다는데 학문의 근대화를 지향한 리규경의 실학적학풍의 특징과 진보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