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2017.12.1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적사실들을 바로 평가하여 우리의 새 세대들에게 옳은 인식을 주도록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김일성전집》 제40권 111페지)

왜관무역이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왜관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과 일본사이에 진행하던 무역을 말한다.

15세기초 조선봉건왕조는 귀순한 왜인들이 조선과의 무역을 요청하자 그들을 회유할 목적밑에 그들로 하여금 부산포, 염포, 냉이포 등지에 거류하면서 제한된 범위에서의 무역을 하도록 승인하고 그들에 대한 통제기관인 왜관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왜관을 통한 무역이 시작되게 되였다.

왜관을 통한 무역은 대체로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3포왜관과 한성에 있는 동평관에서 진행되였다.

조선봉건왕조는 임진조국전쟁후 일본과의 강화를 체결한 후 1609년 6월 두모포왜관을 설치하였고 1678년에는 그 후신인 초량왜관을 설치하여 그를 통하여 일본사신들을 접대하고 무역활동을 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전까지 수도에 올라온 일본사절들을 접대하던 동평관을 페지하고 그들도 부산에 있는 왜관에서 접대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왜관무역의 형태에는 공무역과 사무역이 있었는데 조선봉건왕조초기에는 공무역이 주도적지위를 차지했다면 그후에는 점차 공무역이 줄어들고 사무역이 늘어났다.

초기 왜관을 통한 무역은 그 대상을 제한하지 않고 조선에 오는 모든 일본의 중소봉건세력들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되였다. 그러나 날을 따라 일본봉건세력들의 사신왕래와 무역활동이 문란해지고 그로 인한 여러가지 페단이 생기는것과 관련하여 조선봉건왕조는 1443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쯔시마도주의 무역선수를 50척으로 한정하고 그 규모를 규정하였다.

그후 조선봉건왕조는 1510년(중종 5년)에 일어난 삼포왜인들의 란동을 진압하고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쯔시마도주가 해마다 보내오는 무역선의 수를 25척으로 축감하였으며 1609년에 체결한 기유약조에서는 다시 20척으로 더욱 제한하였다.

이처럼 왜관에서의 대일공무역은 점차 축감되여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오는 무역품에 대하여서는 무역총액이외에 아무런 제한도 취하지 않은 결과 무역품은 대량적으로 늘어났고 공무역만으로는 이것을 감당할수 없게 됨으로써 조정에서는 한성과 지방의 부유상인들로 호조의 증명서를 가지고 왜관에 드나들며 무역거래를 하도록 하였다.

왜관무역은 임진조국전쟁이전시기까지는 한달에 3회, 17세기에 들어와서는 한달에 6회정도 열리였다.

《통문관지》에 의하면 왜관무역은 원래 3일, 13일, 23일로 한달에 3회, 3일간 진행하던것을 17세기에 들어와 무역량이 많아지고 왜인들의 체류기일이 오래기때문에 1610년(광해군 2년)부터《3순(상순, 중순, 하순)의 3일과 8일로서 한달에 6회로 개시일을 정했다.》고 하였다.

왜관안에서의 무역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무역이 진행되는 개시일에는 조선측에서 무관이 왜관문을 엄격히 단속하여 지키며 조선의 왜관역원인 훈도와 별차 그리고 호조의 수세관, 동래의 군관인 개시감관 등이 소통사를 데리고 왜관안에 들어간다. 무역은 왜관안의 개시대청에서 진행하는데 이때 대마도의 왜관역원인 대관이 같이 립회한다. 수문을 통과한 후 훈도, 별차, 개시감관 그리고 쯔시마의 대관이 각각 개시대청의 상단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상인들은 모두 례의를 차린 후 교역을 진행한다. 교역이 끝난 상인들은 각 방에 들어갈수 없으며 만약 들어갈 때에는 밀무역상인으로 인정하고 엄격히 단속하여 처벌한다. 개시는 그날중으로만 하게 되여있으므로 해가 저물면 왜관문을 닫고 일체 통행을 금지시킨다.

조선봉건왕조가 왜관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물품은 구리, 류황, 랍, 후추, 단목, 물소뿔 등이였고 그 값은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무명과 쌀로 지불하였다. 특히 사무역에서 일본의 은과 청나라의 백사(흰 비단실)를 주요항목으로 하는 중계무역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중국상인들이 일본의 나가사끼와 직접 무역거래를 하게 되면서 조선상인들의 중계무역은 점차 쇠퇴해졌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왜관무역은 여러가지 페단을 낳았다.

왜관을 통하여 진행된 구리와 랍무역으로 하여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실로 컸다. 실례로 17세기초에 무역을 통하여 수입한 구리는 2만 9 373근, 랍은 1만 6 013근으로서 이러한 량의 구리와 랍운반을 통하여 백성들이 겪는 고생은 말할수 없이 컸다.

또한 《공작미》로 인한 페해 역시 구리무역으로 생기는 페단 못지 않았다.

17세기 후반기부터 일본에서도 무명생산이 진행되면서 조선에서 무역해가던 무명대신 쌀을 가지고갔는데 이 쌀을 《공작미》라고 하였다.

이 시기 한해에 《공작미》로 주는 쌀만해도 1만 2 000섬이나 되였는데 그 량곡을 마련하느라 경상도내 인민들의 고통은 말이 아니였다.

또한 왜인들과 조선상인들과의 암거래과정에 비밀이 루설되고 밀무역상인들이 무리로 쓸어드는 관계로 변경이 무질서해졌으며 따라서 나라의 방비에서 빈틈이 생기였다.

15세기초에 출현하여 근 500년간 진행되여온 왜관무역은 1868년 명치유신이후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책동으로 하여 초량왜관의 페쇄와 함께 종식되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