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대학 교원, 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력사와 지리, 군사 등 우리 선조들이 이루어놓은 과학문화유산을 깊이 연구하고 체계화하는데 힘을 넣어야 하겠습니다.》 (
지난날 우리 인민이 농업분야에서 이룩한 농서유산가운데는 《농가총람》도 있다.
《농가총람》은 조선봉건왕조말기의 영농방법과 영농기술의 성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농서중의 하나이다.
《농가총람》은 《천일록》에 들어있는 편목의 하나이면서도 15세기 《농사직설》이 편찬간행된 이후의 영농방법과 영농기술의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있는 문헌이라고 말할수 있다.
《천일록》은 18세기말-19세기초 경기도 수원의 유생 우하영이 오랜 기간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저서이다. 이 책에는 우리 나라 봉건사회의 토지제도, 조세제도, 과거제도, 군사제도를 비롯하여 농업, 광업, 지리, 관방, 민속 등 여러분야의 자료들이 폭넓게 실려있다. 특히 여기에는 당시까지 우리 농민들과 진보적인 농학자들에 의하여 탐구된 영농방법과 영농기술의 성과들이 들어있다.
《천일록》의 편찬자 우하영은 농사와 관련한 책을 새로 편찬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농사직설》이 편찬된 이후시기의 영농기술과 영농방법을 종합하여 《농가총람》을 편찬하였다. 그는 《농가총람》을 편찬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농사짓는 방법은 예전에 나온 책들에 씌여진대로 하여야 하겠으나 옛날과 지금은 기후가 같지 않고 농사법이 또한 적지않게 달라진것을 고려하여 외람됨을 무릅쓰고 옛날의 방법을 수집하고 여기에 의견을 첨부하여 이 책을 묶는다.》고 하였다.
《농가총람》은 당시까지 우리 농촌들에서 이룩된 영농방법과 영농기술의 성과들을 자료적으로 보여주고있다.
《농가총람》에는 무엇보다먼저 육종사업과 종자정선에서 이룩된 성과에 대하여 보여주는 자료들이 실려있다.
우선 주요작물의 육종에서 이룩된 성과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
《농가총람》에 의하면 이 시기 벼와 밭곡식의 평균생육기일이 벼는 150일로서 이른것은 120~130일이였으며 늦은것은 160~170일, 밭곡식은 100일로서 이른것은 90일, 늦은것은 120~130일이였다. 그러나 올종으로서 50일만에 여무는 50일조(벼), 세꽃조, 외꽃조 등을 기름진 밭에 심어 수확을 높였다고 한다. 50일피 역시 2월말경에 심어 4월 보름이면 여무는 올종으로서 수염이 없고 여물면 희끄무레한 색을 띠는데 기름지고 습한 땅에 심으면 잘되는 품종이였다. 이밖에 저무시리차조라는 조가 있었는데 이 품종은 5월초에 심으면 7월안으로 이삭이 패는 품종이였다.
일찍 심어도 늦게 여무는 품종도 있었는데 그러한 품종으로는 잘외콩과 보리산도를 들수 있다. 잘외콩은 3~4월에 심으면 9월이 되여야 여무는 품종이고 보리산도는 바람에 잘 견디는 벼품종으로서 비록 척박한 땅에 심어도 수확이 괜찮다고 한다.
《농가총람》에 의하면 춘분으로부터 상강에 이르는 사이의 날자는 매번 200일정도인데 그사이에 벼는 두번 심기 어려우나 밭곡식은 능히 두번 심을수 있고 절기가 다소 늦어질 때에는 대서가 6월 20일경이 되고 상강은 9월 30일이전에 있게 되는데 6월 20일경에 그루갈이를 한것은 상강에는 여물었다.
우하영은 18세기에 이르러 전세기와는 달리 추위가 일찌기 닥쳐온다고 하면서 한로가 지나게 되면 곡식이 여물지 못하는데 이 리치를 모르고 절기의 순차만 믿고 시기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실정은 당시의 농민들과 농학자들로 하여금 날씨의 변화와 산곡간의 다양한 기후풍토조건에 적응된 품종들을 얻어내는데 힘을 넣게 하였다.
《농가총람》에 올라있는 보리산도, 세꽃조, 외꽃조, 저무시리차조, 50일조, 50일피, 잘외콩 등은 《금양잡록》을 비롯한 농서들에서도 찾아볼수 있는 곡종들이지만 당시 우리 나라의 기후풍토조건에 맞게 육종개량된 우수한 품종들이였다.
이밖에도 새롭게 육종된 품종들에는 북쪽지방에서 잘되는데 남쪽지방에서 잘되지 않는것, 남쪽지방에서는 잘되나 북쪽지방에서 잘되지 않는것, 같은 지방이라도 벌에서는 잘되는데 산간지대에서는 잘되지 않는것, 반대로 산간지대에는 적응하나 벌에는 적응되지 않는것, 척박한 땅에서 잘되는데 도리여 비옥한 땅에서는 잘되지 않는것, 바람에 잘 견디여내며 땅을 가리지 않는것 등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다.
우의 자료들은 이 시기 농민들과 농학자들의 창조적노력에 의하여 진행된 육종개량사업이 주로는 기후풍토에 맞는 올종과 가물, 바람에 견디는 품종을 얻어내는 방향에서 진행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우하영은 곡식의 특성을 알아내는 방법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생물학적연구와 실험을 할것을 제기하였다. 그는 자기의 실험방법대로만 한다면 《품을 절반 들이고서도 성과는 배나 날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저자의 연구방법이 근대적인 식물생리학적인 방법으로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그의 연구태도는 농업기술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볼수 있다.
또한 종자의 정선에서도 일정한 전진이 있었다.
《농가총람》에서는 종자준비에서 나서는 중요한 요구는 선택된 종자의 정선을 잘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종자처리방법에서 《농사직설》의 부족점을 지적하고 종자선별과 처리에서 보다 합리적인 방법을 제기하였다.
《농사직설》에서는 종자처리방법에 대하여 《겨울에 독이나 나무통을 얼지 않게 묻어두었다가 12월에 가서 눈녹인 물을 받아 가득 채우고 덮개를 씌워두었다가 파종시기가 되면 종자를 그 물에 담그었다가 건져내여 해볕에 쪼이기를 세번 거듭하거나 소나 말 외양간의 오줌을 모아 큰 나무통에 담고 종자를 거기에 담그었다가 건져내여 해볕에 말리기를 세번 반복하여야 한다.》고 씌여있다.
이에 대하여 우하영은 《농사직설》에서 소개된 방법이 이미 옛날사람들이 시험해본 방법이지만 《아주 완전한 방법이라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만약 <직설>에 있는 방법대로 12월에 눈녹인 물이나 외양간에서 받은 오줌에 종자를 담그었다가 건져내여 해볕에 말렸다가 또 담그기를 세번씩이나 거듭한다면 담그었다 말렸다하는 동안 종자가 상할수 있다.》라고 그 부족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종자정선은 주로 《종자를 채로 쳐서 잘 여물지 못한 낟알과 돌피를 골라버리고 충분히 말린 후 파종할 때 다시 키로 까불고 물에 담가 실하지 못한 종자와 물우에 뜨는 쭉정이 등을 모조리 제거하여야 한다. 이렇게 선별된 종자를 가마니에 넣어 2~3일동안 물에 담그었다가 다시 건져내여 하루쯤 묵여서 수분만 흡수시킨 다음 해볕에 말리는 방법으로 처리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농가총람》에는 다음으로 거름장만과 거름내는 방법에서 이룩된 성과를 보여주는 새로운 자료들도 기록되여있다.
《농가총람》에는 우선 거름원천과 거름만드는 방법 등 거름과 관련된 자료들이 상세히 실려있다.
당시 농촌들에서 리용된 거름원천으로서는 집짐승우리에 넣었던 두엄, 분토, 오줌을 비롯하여 벼짚, 잔디, 깨묵, 목화씨, 버드나무, 가둑나무, 갈풀, 잡초 등 썩일수 있는것은 모조리 거름원천으로 되였다.
거름을 만드는 방법을 보면 가을부터 봄씨붙임전까지는 곡짚들과 콩대, 곡식껍질과 쭉정이, 쌀겨, 짚북데기 등을 집짐승우리에 넣어 밟혀내고 봄이후에는 절기에 따라 풀을 베거나 또 잔디를 깎고 버드나무가지를 꺾고 락엽을 모아 외양간에 깔았다가 웅뎅이에 쌓아두는 방법으로 하였다.
이밖에도 산과 들에서 풀을 베여 논에다 깔아주어 덧거름을 주지 않는 조건에서도 곡식의 결실을 완전하게 하였다.
거름으로는 파벽토와 여러가지 재도 리용되였다.
거름을 내는 방법 역시 토양의 특성과 곡식에 따라 각이하였다.
거름주는 방법은 토양의 특성에 따라 구별되였다. 건조한 땅에는 집짐승들의 오줌똥을 내고 굳고 진득거리는 땅에는 외양간에서 나온 거름을, 지대가 낮고 습하여 곡식을 심을수 없는 땅에는 풀을 썰어서 서리가 내린 후에 두껍게 폈으며 모래땅으로서 곡식이 전혀 안되는 곳에는 장마가 닥치기 전에 할미꽃풀을 두껍게 펴서 땅을 썩이는 방법으로 하였다.
거름주는 방법은 곡식의 특성에 따라서도 구별되였다. 대표적으로 조와 기장밭에 거름내는 방법을 들수 있는데 먼저 잘 썩인 인분과 오줌재가 많은가 적은가를 보고 많으면 종자 한되에 두섬정도의 거름을 주었고 인분과 오줌재가 없는 경우에는 풀을 베여 밭에 펴서 말린 다음 불을 지르고 파종하였고 가을보리밭에는 도토리를 푹 삶은 다음 도토리와 함께 그 물까지 뿌리였다.
파벽토나 오래된 구들재를 거름으로 주면 그것이 낮고 습한 땅에는 아주 유익하나 높고 건조하고 모래와 돌이 섞인 땅에는 도리여 가물을 더 타게 하여 곡식을 말라죽게 할 념려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거름을 각각 논밭의 토질에 맞게 줄것을 강조하였고 가을보리밭은 작은 이랑을 만들고 이랑을 따라 씨를 뿌리므로 거름도 이랑을 따라가면서 씨를 뿌린곳에다 주어야 그 효력을 충분히 나타내게 된다고 하였다.
거름을 종자와 뒤섞어서 뿌리는 방법도 있었다. 《농가총람》에 의하면 가을보리 한말과 소금 한되에 재를 섞어서 심는 방법, 종자 한말에 소금 두되를 섞어서 심는 방법 등 매우 다양하였다.
이와 함께 모판 덧거름의 종류와 주는 시기를 보여주는 자료도 실려있는데 덧거름으로서는 묵은 구들재와 온돌에서 나온 흙이 아니면 재와 섞어서 만든 거름, 누에똥, 닭똥을 비롯하여 참깨묵이나 들깨묵을 짓찧은 가루 등을 모가 한치 남짓하게 자랐을 때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15세기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의 농서들에서는 모판 밑거름에 대한 론의는 많으나 덧거름을 줄데 대하여서는 언급되여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판에 덧거름을 줄데 대한 의견은 이 책에만 볼수 있는 매우 가치있는 자료이다.
《농가총람》에는 다음으로 토지리용률제고와 토지개량에서 이룩된 성과를 보여주는 자료들도 실려있다.
당시 토지리용률제고에서 기본은 갈이법이였다.
논밭갈이는 가을에는 엄경을 하고 봄에는 번경을 하는데 엄경은 생땅이 나오도록 깊이 갈고 번경은 비교적 얕게 갈았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전해에 지었던 이랑을 그 다음해에는 갈아엎고 그 자리에 고랑을 내는 방법 즉 한해건너 고랑과 이랑을 엇바꾸어가며 땅을 리용하는 대전법이 널리 도입되였다. 우하영은 소에 후치를 메워 이랑사이를 천천히 갈아가면서 후치질로 이랑에 북을 주어 가물과 바람에 곡식이 말라죽거나 쓰러지지 않게 하는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는것을 강조하였다.
논밭갈이는 대개 소 두마리를 메워서 하고 립종한 후 후치질은 소 한마리로 하였다.
이와 같이 하는것은 당시 전국적으로 거의 같았다. 다만 경상도의 남부지방과 전라도의 평야지대에서는 논밭갈이도 소 한마리로 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의 함흥과 영흥(금야)지방에서는 논밭갈이에 기경용전차(田車)를 사용하였다는 자료도 기록되여있다.
이밖에도 그루갈이법과 함께 대우법이 실시됨으로써 일찌기 서리가 내려도 안전한 수확을 내다볼수 있었다. 대우법이라는것은 밀, 보리를 심은 이랑에 따라 호미로 흙을 긁고 콩을 심는것인데 호미가 고무래를 대신하여 밭갈이에 리용되기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였다.
토지개량방법에서도 일정한 전진이 있었다.
《농가총람》에서는 영농에서 지켜야 할 원칙의 하나가 땅다루기를 잘하는것이라고 하면서 땅을 분양, 도니, 려식, 단척 등 네가지로 구분하고 그가운데서 한자깊이로 파서 진득진득하고 미끈미끈하며 달고 짜지 않은 땅이 가장 좋고 속이 비고 거칠며 짜고 가라앉지 않으면서 딴딴한 땅이 제일 나쁘다고 하였다.
토지개량방법을 보면 우선 거름을 많이 내거나 심어놓은 곡식을 이삭만 자르고 갈아엎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곡식을 심을수 없는 땅이라도 외양간의 거름을 두텁게 편 다음 밀, 보리를 심었다가 베여들일 때 그 이삭만 자르고 짚은 그냥 세워둔채로 곧 갈아엎고 록두를 심었으며 록두도 그 꼬투리만 따들이고 줄기와 잎은 세워둔채로 즉시 갈아엎었다.
또한 논판과 모판에 누렁흙(황토)과 개바닥흙을 고루 펴고 엎어갈이를 하거나 장마철에 물이 불어서 흐린 물이 흘러내릴 때에는 논두렁을 헤치고 흙물을 받아들여 비옥한 땅으로 개량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논에는 오래 묵은 파벽토를 많이 폈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에는 흙을 파다가 넣고 불을 지펴서 흙을 구워내는 소토법이 널리 퍼져서 거의 일과처럼 되였다.
이처럼 17세기이후 토지리용률제고와 갈이 및 토지개량방법에서 일정한 전진이 있었다.
《농가총람》에는 다음으로 물확보와 물리용률제고에서 이룩된 성과에 대하여 보여주는 자료들도 실려있다.
《농가총람》에 의하면 이 시기 농촌들에서 진행된 물확보는 주로 보를 쌓아 물을 가두어두는 방법으로 하였다.
18세기말에 이르러 왕가물, 큰물. 해일, 우박, 서리에 의한 피해가 심하였다. 농민들은 이에 대처하여 파괴된 저수지들과 류실되였거나 짠물이 밴 논을 제힘으로 수복하고 새로운 언제들을 쌓아올렸다.
당시의 관개형편에 대하여 《농가총람》에는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관개를 많이 하였는데 특히 봉산, 재령, 신천, 안악사이는 수백리에 달하는 평야지대이지만 다 관개를 하였다고 씌여져있다.
물확보와 함께 물리용률제고에서도 일정한 성과가 이룩되였다.
《농가총람》에는 《경상도를 비롯한 나라의 동부지방들에서는 수로가 통하기 곤난한 곳에서 나무나 돌을 올려쌓고 흙을 채워 도랑을 만들고 물을 끌었으며 관개를 많이 하는 서부지역들에서는 물다리를 만들어 물을 끌었는데 이것이 퍼져 충청도지방을 비롯하여 절벽이 가로놓인 곳에서는 나무통으로 물길을 만들고 물을 끌어다 관수를 하였다.》는 자료를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다.
《농가총람》에는 이밖에도 조, 기장, 밭벼를 비롯하여 목화, 메밀, 호마, 참깨, 들깨, 담배 등 각종 작물의 재배법과 반종법, 제철에 김매기와 거두어들이기, 모내기에 대한 의견, 메뚜기를 쫓는 방법, 잠업 등 당시의 농민들과 농학자들에 의하여 이룩된 영농방법과 영농기술의 일단을보여주는 자료들이 실려있다.
그리고 이 시기 농민들이 광범하게 사용하였던 영농기구들에 대한 자료들을 비롯하여 닥나무를 많이 심어 그것으로 질좋은 종이를 생산하였다는 자료, 닥나무가 잘되지 않는 함경도지방에서는 짚으로 황고지를 만들어썼다는 자료 등 매우 가치있는 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
이와 같이 《농가총람》은 근면한 우리 인민들의 창조적로동과정에 이룩된 경험과 성과들을 개괄하고 당시 농민들과 진보적인 농학자들에 의하여 새롭게 밝혀진 앞선 농법들을 일정하게 보급함으로써 당대 농업생산발전에 도움을 주었으며 사회발전을 촉진하는데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