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민족의 혈통을 거세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책동

 2019.6.15.

조선에 대한 일제의 40여년에 걸치는 식민지통치에서 가장 악랄한것은 사상문화분야에서 조선인민의 민족성을 깡그리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한것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인민의 민족적각성을 마비시킬 목적으로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우리의 민족문화를 없애버리려 하였으며 일본말과 일본풍습과 일본문화와 일본의 이른바 〈신도〉종교를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였습니다.》 (김일성전집》 제7권 457페지)

신사참배라는것은 신도의 절간인 신사에 찾아가 일본의 하늘과 땅, 사람을 창조한 건국신이라고 하는 《아마데라스 오미까미》(천조대신)와 그의 적자로서 《현인신》이라고 하는 《천황》에게 절을 하고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것으로서 허황하기 그지없는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

1868년 명치유신을 계기로 발생한 일본군국주의는 당대의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신도를 불교, 그리스도교 등 일반종교의 우에 존재하는 전국민적사상의식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국가적인 자금을 투자하여 일본전국에 수많은 각이한 급의 신사들을 설치하고 그에 대한 참배를 의무화하여 종당에는 신사가 《천황》을 우두머리로 하는 군국주의적국민정신의 중심으로 되게 하였다.

식민지통치시기 일제의 신사참배는 조선인민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저들의 식민지노예로 만들기 위한 《황국신민화》 즉 《천황》에게 절대복종하는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강행되였다.

일제는 우선 조선에도 일본에서와 같이 각이한 급의 신사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신사체계를 확립하는데 달라붙었다.

1915년에 《신사규칙》이라는것을 발표하고 1918년부터 1925년 10월까지 150만원의 공사비를 투자하여 한성남산에 조선신궁이라는것을 세워놓았다.

이 신궁은 앞으로 일제가 우리 나라 도처에 세울 모든 신사들의 총본산격이였다.

일제는 이 신궁에 《천조대신》과 조선침략에서 악명을 떨치다가 뒈진 일본군국주의의 우두머리였던 《명치천황》(무쯔히도)을 제신으로 안치하였다.

일제가 조선신궁을 세운 목적에 대하여 이 신궁의 궁사로 있던 자는 《신사를 통해 내선일체와 태고의 환원을 성취》, 《반도대중의 정신생활의 중추를 밝히고 그 실행할바를 명시하는것》이라고 줴치였다.

조선신궁을 설립한 일제는 193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신사를 확대하기 위하여 전국도처에서 신사건설놀음을 벌려놓았다.

전주신사
그림 1. 전주신사
평양신사
그림 2. 평양신사
한성신사
그림 3. 한성신사
부산 룡두산신사
그림 4. 부산 룡두산신사

1931년 9월에 한성신사, 인천신사, 대구신사, 부산 룡두산신사, 평양신사를, 1932년에는 개성, 대전, 전주, 광주, 청주, 공주, 군산, 마산, 진해, 진주, 해주, 진남포, 안주, 춘천, 함흥, 원산, 라남, 청진, 회령 등 20개소에 신사를 세웠으며 1936년 8월에는 한성신사와 부산 룡두산신사, 1939년 5월에는 대구신사와 평양신사, 1941년 10월에는 광주신사와 강원신사를 국페소사로 승격시켰으며 1939년 6월에는 관페대사급의 부여신궁의 착공을 선포하고 그 공사를 강제추진하였다.

국페소사와 관페대사는 신사의 급수에 따르는 이름이다.

1871년 7월 일제가 발표한 신사등급에 관한 《향사정책》에 의하면 모든 신사를 관사와 제사(여러 신사)의 두 등급으로 나눈다는것, 관사의 종류를 관페사와 국페사의 두 종류로 나누며 그것을 각각 대, 중, 소 세등급으로 구분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사들은 모두 신도를 맡아보는 국가기관(신기관)이 맡아서 관리하는데 관페사의 제사는 국가기관이, 국페사의 제사는 지방관이 집행한다. 이러한것을 놓고 볼 때 일제가 건설한 관페대사급의 조선신궁은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는 신사의 총본산이며 국페소사는 도, 부청급에서 관리하며 일반신사들은 그 아래의 식민지통치기관들에서 관할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일제는 이것도 모자라 1938년 3월 한성과 라남에 호국신사를 세우기로 결정하였으며 1943년에 한성호국신사건설을 완공하였다. 이것들은 침략전쟁의 확대와 함께 전몰자들의 위령신사격으로 세워진것들이였다.

일제의 신사체계확립책동으로 조선에는 1931년말에 1개의 신궁, 50개의 신사, 186개의 작은 신사가 있었으며 1942년말에 와서는 관페대사급 신궁 2개, 국페소사급 신사 6개, 신사는 55개, 작은 신사는 828개에 각각 이르렀다.

일제는 또한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조선인민에 대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은 9.18사변을 조작하여 만주를 강점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 10월 30일 왜왕 히로히도는 문부대신 다나까에게 《건전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하여 힘쓰라.》고 훈시하였으며 조선총독 우가끼는 그해 11월 6일 《총독부훈령 제45호》로서 《당면하게 급한 일은…국민의 교양을 추진시키며…국력을 충실히 하는 원천을 완성케 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조선에서 신사참배를 비롯한 《황국신민화》정책을 보다 로골적인 파쑈적방법으로 강행할것을 지시하였다.

중일전쟁도발이후 조선총독 미나미는 직접 조선신궁을 찾아가 《황군》의 《무운장구》를 빌어 참배하고는 즉시 각 도청에 명령하여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신사참배를 단행할것을 지시하였다.

미나미의 명령에 따라 일제는 조선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을 신사참배에 강제로 끌어내였다.

일제는 이 시기 일본이 생겨났다는것을 기념한다는 《기원절》, 조선침략의 원흉인 무쯔히도가 출생하였다는 《명치절》, 살아서 일본을 통치하는 쇼와《천황》의 난날을 《축하》한다는 《천장절》 등 이른바 국가명절들과 《흥아봉공일》, 《애국일》, 《대조봉대일》에 각종 《기념행사》놀음을 벌려놓고 조선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을 강제로 끌어내여 신사에 절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급 학교의 학생들에 대하여 1주일에 한번씩 의무적인 집단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일반주민들이 신사앞을 지나는 경우에는 반드시 절을 하도록 하였다. 지어 1943년부터는 《아마데라스 오미까미》의 귀신이 들어있다는 《가미다나》(신사의 축소형태로서 나무로 만든 작은 귀신상자)를 집안의 가장 《깨끗한 곳》에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도록 하였고 이 정형을 장악통제하기 위한 《반상회》라는것까지 조작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는 폭압적인 성격을 띠고 감행되였는데 만일 신사참배에 불응하거나 불평할 때에는 《불온사상》의 소유자로 되여 헌병, 경찰에 의하여 체포구금되거나 《비국민》으로 취급되여 각종 행정적 및 경제적제재를 받는것이 일반적이였다.

일제의 신사참배강요는 본질에 있어서 조선인민의 민족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인 민족적혈통을 거세말살하기 위한 사상정신적탄압으로서 정치군사적폭압과 탄압학살, 경제적략탈에 못지 않는 죄악중의 죄악이다.

매개 나라, 매개 민족은 자기의 고유한 시조를 가지고있으며 이에 대한 숭배는 너무나도 응당하고 초보적인 권리이다.

일제가 반만년력사이래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인 조선인민에게 일본의 《아마데라스 오미까미》를 조선의 시조로 인정하고 《천황》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다지며 나아가서 침략전쟁의 《승리》와 장병들의 《무운장구》를 빌게 한것은 조선인민의 민족적혈통과 넋을 말살하기 위한 가장 파렴치하고 악랄한 반인륜적죄행으로 된다. 하기에 조선인민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였을 때 제일먼저 일제가 도처에 설립한 신사들을 모조리 까부셔버리였던것이다.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반인륜적죄악은 세기가 바뀌고 천만년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절대로 용납할수 없다.

전체 조선민족은 지난 식민지통치시기 일제가 감행한 죄악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으며 천백배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