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대의 작가와 작품을 문학사나 예술사에서 취급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작가, 예술인들과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우리 문학사와 예술사에도 당대 문학예술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작가와 작품이 있었다는것을 알려줌으로써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동시에 지난날의 력사에서 경험과 교훈을 찾게 하자는데 있다.》 (
우리 나라 력사에 이름을 남긴 재능있는 문인들가운데는 조선봉건왕조말기 시문학의 대표자의 한사람인 조수삼[1762.7.16-1849.5.5(음력), 자: 지원, 자익, 호: 추재, 경원]도 있다.
그는 봉건제도의 분해과정이 촉진되고 그 태내에서 자본주의적관계가 서서히 발전하였으며 선진적인 실학사상이 보급되던 시기에 평민가문에서 삼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조수삼이 즐겨쓴 호인 경원은 풍부하게 축적해온 학식을 바탕으로 삼고 농사군이 농사를 짓듯이 꾸준히 창작에 힘써 성과를 거두려는 자기의 심정을 반영하여 지은것이다.
어린 나이에 글을 익히고 력사와 경전뿐아니라 이름난 문인들의 문집들도 탐독한 그는 사람들을 경탄시키는 우수한 시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여 어려서부터 문학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였다.
조수삼은 10대의 소년시기에 여러 스승들의 지도방조밑에 학문에 힘을 넣으면서도 고루하게 현실과 떨어져 글읽는 방에만 들어앉아있으려 하지 않았다.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을 반대한 조수삼은 세계를 알고 진리를 탐구하는것을 자기의 목적으로 내세우고 나라의 방방곡곡을 돌아보면서 다방면적인 지식과 풍부한 체험을 쌓아나갔다.
이러한 체험은 그로 하여금 일찍부터 수많은 문화유적, 유물을 이룩하여놓은 선조들의 뛰여난 재능,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깊이 느끼게 하였으며 사회생활의 이모저모를 다방면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였다.
이 과정에 그의 학식과 재능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그것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에서는 그의 풍부하고 다방면적인 재능을 리용하기 위해 20대후반기부터 그를 국가적인 외교사업에 인입하였다.
1790년 처음으로 사신단의 한 성원이 되여 이웃나라에 파견된 조수삼은 로상에서 짧은 기간에 그 나라 언어를 익혀 그 나라 사람들과 글로써가 아니라 자유로운 대화로 의사소통을 진행하였다고 한다.
조선봉건왕조에서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뛰여난 재능으로 하여 여러차례나 국가외교사업에 자주 선발된 하나의 사실만 놓고보아도 당시 사회적으로 조수삼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높았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의 학식과 재능이 뛰여나고 명망이 높다고 하여도 평민출신이라는 신분적제한성으로 하여 1844년 82살에야 비로소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는 벼슬을 하면서도 실학파문인들과 평민출신의 문인들을 비롯하여 각이한 사람들과 교우관계를 맺고 자기의 지식과 견문을 넓히고 수양을 더욱 높여나갔다.
조수삼의 후배인 조희룡(1797-1859)은 《호산외사》에서 조수삼의 다방면적인 재능을 전하면서 《세상에서는 추재에게 무릇 10가지 재주가 있는데 그 한가지만이라도 얻는 사람은 한생을 편안히 보낼수 있을것이라고 일러오고있다. 그 첫째는 풍모요, 둘째는 시문이요, 셋째는 공령(문과과거를 보는데 리용되는 글의 체)이요, 넷째는 의학이요, 다섯째는 장기와 바둑이요, 여섯째는 그림이요, 일곱째는 기억력이요, 여덟째는 담론이요, 아홉째는 복있는 운수요, 열째는 수명이다.》라고 하였다.
이 하나의 평가를 통하여서도 조수삼의 다방면적인 재능을 잘 알수 있다.
특히 조수삼은 시작품들을 분석평가하는데서 시인의 의도를 깊이 파악하고 재능을 옳게 가려보아야 한다는 미학적견해를 가지고있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수많은 시들을 지어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아보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시들도 수많이 보고 평가하는 과정에 작품을 옳바로 평가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는것을 인식하였으며 그로부터 실속없는 빈소리로 무작정 추어주거나 내리깎는것과 같은 불공정한 비평을 반대하는 립장을 취하게 되였다.
조수삼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시를 평가하면서 아무런 타당성도 없이 다른 나라의 이름난 문인의 기풍이 있다고 칭찬한데 대하여 《그 말이 과연 깊이 알고 본것이 많은데서 우러나온 말인지 그렇지 않으면 지나는 말로 잘됐다고, 이를테면 점쟁이가 사주팔자 보아주는 그러한 식의 칭찬이 아니였는지.》하고 의심을 표시하면서 자기가 지은 시들의 결함에 대하여 스스로 겸손하게 지적하였다.
이러한 미학적견해를 가진 조수삼은 당시 사회적으로 무시할수 없는 력량으로 자라난 평민출신의 문인들과 함께 재능은 있으나 사회적으로 버림을 받는 평민들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불만, 당대 사회현실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반영한 시들을 적지 않게 창작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시작품가운데는 지식이나 재능보다도 문벌과 신분에 따라 사람들을 갈라놓고 인격과 존엄을 무시하는 당시의 사회현실에 대한 불만의 사상감정이 깊이있게 반영한 시 《진사시험에 합격한 날 칠보시를 짓노라》, 《성밖을 나와 약산을 찾는 길에》, 《밤에 앉아서》, 《집을 옮기면서》와 불합리한 사회현실에 눈을 돌려 가난속에 허덕이는 인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동정하고 그들의 반봉건투쟁을 반영한 시 《강진에서》, 《롱성에서》, 우리 인민들의 로동생활과 세태풍속을 노래한 시 《밭갈이와 길쌈낳이》, 《세벌김》, 《길쌈》, 《연》 등이 있다.
그의 시문학유산은 《추재집》(8권)의 1-7권에 그대로 실려있다.
조수삼이 사망한 이후에 편찬된 《추재집》에는 작가가 살아있을 때 묶어진 《경원시총》, 《추재시초》, 《추재시고》 등에 실려있던 시들이 전부 올라있으며 이미 이 저서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져있었다.
이처럼 추재 조수삼은 비록 평민출신의 시인이였지만 정치와 경제, 력사와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뛰여난 재능을 소유하고 품성이 바른것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은 재능있는 문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