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민족문화유산을 통해 본 조선의 까치

 2023.10.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나라의 국호와 국기, 국장과 국화를 비롯한 국가의 상징들을 소중히 여기도록 교양사업을 잘하여 학생소년들에게 조선민족의 긍지와 자부심, 애국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국조는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새로서 해당 나라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지고 가장 친숙해진 새 또는 특산종들로 정해진다.

조선에서는 주체112(2023)년 2월 2일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1220호로 채택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상징법》에 따라 까치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조로 선정하였다.

조선의 국조-까치
사진. 조선의 국조-까치

국조로 선정된 까치는 조선의 평화애호적립장을 상징한다.

까치는 먼 옛날부터 조선인민의 민족적정서와 생활감정에 잘 어울리는 새로서 길조로 널리 알려져있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까치의 간결하고 뚜렷한 몸색갈과 경쾌하고 명료한 울음소리는 화려하고 기교적인것보다 소박하고 단아한것을 좋아하는 조선민족의 감정과 정서에도 잘 맞는다.

예로부터 조선에서는 까치를 기쁨을 가져다주는 새라고 하여 《희작》(喜鵲-까치우는 소리를 들으면 기쁜 소식이 있다고 하는것)이라고 불리워왔으며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거나 일이 잘되게 하는 《행운의 새》로 인식되여왔다.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나 소식이 온다고 하였으며 설날 새벽에 길을 가다가 처음으로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해에 농사가 잘되고 행운이 온다고 한것 등은 까치가 조선사람들의 생활과 매우 가깝게 련관되여있는 새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하기에 조선의 력사자료와 미술작품, 문학작품과 속담 등 문화유산들에는 까치를 사랑해온 조선사람들의 감정과 정서가 잘 반영되여있다.

우선 조선에는 까치를 길조로 기록한 력사자료들이 적지 않게 있다.

까치를 길조로 기록한 력사자료중에서 가장 오래된것이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신라의 제2대왕인 탈해니사금(재위 57-80년)과 관련된것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탈해니사금은 알에서 나왔는데 그 아버지는 자기 안해가 알을 낳았기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버리라고 하였다. 탈해의 어머니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알을 비단으로 싸서 궤속에 넣어 바다로 보냈는데 그것이 진한의 아진포어구에 닿았다. 해변가에서 살던 할머니가 궤를 열어보니 어린애가 한명 있었는데 후에 어른으로 자라 체구가 남달리 컸다. 그의 이름은 바다에서 궤가 떠올 때에 까치 한마리가 울면서 따라왔다고 하여 《까치작》(鵲)자를 간략하여 《옛석》(昔)자로 성씨를 삼았으며 궤짝을 풀고 나왔다고 하여 《벗을탈》(脫)자와 《풀해》(解)자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니사금 원년)

《삼국유사》에는 《<이 바다에는 원래 바위들이 없는데 웬 까닭으로 까치들이 와서 울고?>하고는 배를 저어 찾아가 보게 하니 어떤 배 한척우에 까치들이 몰켜있었다.》(《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2 제4대 탈해왕)라고 기록되여있다.

기록들에서 보는것처럼 석탈해의 출생은 까치와 관련되여있다. 그의 성이 작(까치)자를 간략하여 석(옛)자로 되고 이름도 궤짝을 풀고 나왔다고 하여 탈해라고 지은것은 비록 왕의 존재를 신비화하는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까치가 오래전부터 조선사람들속에서 친근한 새로 인식되여있었다는것을 시사해주고있다. 이와 함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석탈해의 출생과 관련한 이야기가 A.D. 1세기의것이라는것을 놓고 볼 때도 조선민족은 매우 오래전부터 까치를 길한 새로 여기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까치를 길조로 기록한 력사자료는 삼국시기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있다.

실례로 고려시기에 나온 《거사련》(그리운 님)을 들수 있는데 어느한 녀성이 부역에 끌려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가요이다. 여기서 녀성은 희소식을 전하는 까치를 등장시켜 그리운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소박한 감정을 잘 나타내였다.

울타리곁 꽃가지엔 까치가 깍깍

상머리엔 거미가 줄을 늘이네

그리운 님 멀지 않아 오시려나봐

내 마음에 이렇게 미리 알리니

자료를 놓고보아도 고려시기에 까치가 조선사람들속에서 희소식을 전하는 길조로 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까치를 길한 새로 기록한 자료들이 적지 않은데 대표적으로 1532년에 탁연이라는 중이 《계룡산아래에 있는 한 마을에 몸뚱이는 희고 가슴이 붉으며 꼬리가 검은 까치를 보았다. 거기에 사는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새끼들이 매해 올빼미에게 먹히웠는데 슬퍼서 그렇게 되였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서 대가리가 희기 시작하였고 2년이 되여서는 대가리가 모두 희였으며 3년이 되여서는 그 몸뚱이가 두루 희여지다가 금년에 와서 다행히도 그 재난을 면하였는데 점차 본래 모양으로 되였다.》(《증보문헌비고》 상위고)고 말한 사실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 자료를 보아도 당시 사람들이 재앙을 당한 까치를 동정하고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박한 감정이 잘 나타나있으며 까치가 사람들이 사는 마을들에 둥지를 틀고 산 길한 새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조선에는 또한 까치의 모습을 다양하면서도 생동하게 그려놓은 미술작품들이 적지 않게 있다.

대표적인 그림으로서 류숙의 그림 《매화와 까치》, 윤인걸의 그림 《여우와 까치》, 리수문의 그림 《버들과 까치》, 조속의 그림 《까치》와 화가미상들인 판화《매화와 까치》(《조선유적유물도감》 18권 1996년 429페지), 판화《까치와 꽃》, 《작호도》(까치와 범그림)등을 들수 있다.

류숙은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화가로서 그가 창작한 작품 《매화와 까치》는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

그림에서 매화나무가지에 앉아있는 까치의 모양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색채의 능란한 구사, 매 부분의 세부들이 진실하게 형상되여있는것은 까치가 조선인민과 오래전부터 친숙해진 새라는것을 직관적으로 잘 보여주고있다.

까치와 관련한 력사미술작품들
그림 1. 까치와 관련한 력사미술작품들

조선봉건왕조 후반기에 활동한 조속도 까치를 잘 그린 화가로 알려져있다. 그는 산수화, 화조령모화 등에서 보다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작품으로서는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여있는 《까치》와 함께 《꽃과 새》, 《매화와 까치》,《작매도》 등이 있다.(《근역서화징》 권 5 선대편 조속)

까치와 관련한 력사미술작품들
그림 2. 까치와 관련한 력사미술작품들

이와 함께 19세기말-20세기초에 활동한 리도영도 민족미술을 고수하고 조선화를 계승발전시키기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면서도 화조화 특히 까치와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가 창작한 작품들로서는 《까치와 꽃》을 비롯하여 근 50점이나 된다.

까치와 관련한 력사미술작품들
그림 3. 까치와 관련한 력사미술작품들

류숙과 조속, 리도영을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까치들은 오늘날의 까치모습과 신통히도 같으며 주위생활환경도 별로 다름이 없이 묘사되여있는데 이것은 까치가 사람들의 생활과 매우 친숙해진 새였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조선에는 또한 까치를 사람들의 생활과 결부하여 생동하게 묘사해놓은 문학작품과 속담들이 있다.

까치와 관련된 문학작품으로서는 《평양전설》에 실려있는 《은혜를 갚은 까치》를 들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옛날 대동강가에 착한 한 어부가 살고있었는데 어느날 그가 고기를 잡으러 련광정밑으로 지나가다가 련광정지붕우에서 까치둥지로 기여오르는 뱀을 보고 때려죽였다. 며칠후에 그는 배안에서 깜빡 잠들었는데 련광정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눈을 떴다. 순간 큰 뱀 한마리가 배에 기여올라와 물려고 하자 어부는 노대를 들어 뱀의 대가리를 힘껏 쳐 강물에 떨어뜨렸다. 어부는 위험을 예고해준 그 종소리가 두마리의 까치가 종을 들이 받아 친것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으며 은혜를 갚고 죽은 한쌍의 까치를 련광정곁의 둔덕에 고이 묻어주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조선사람들은 까치와 관련한 속담들을 많이 만들어 자기들의 생활에 리용하였다.

그러한 대표적인 속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아침까치는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까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상서로운 새로 전해져오므로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예로부터 이르는 말]

∘ 까치가 있으면 인가가 있고 인가가 있으면 기쁜 소식 전해줄 귀인이 있다.[까치는 사람이 사는 마을가까이에 사는 날짐승이므로 까치가 있으면 인가나 마을이 있고 인가나 마을이 있으면 기쁜 소식을 전해줄 귀한 손님이 온다고 예로부터 일러오던 말]

∘ 까치는 까치끼리 살랬다.

조선에서 이러한 전설과 속담들이 나오게 된데는 까치가 오래전부터 조선의 전국각지에 퍼져 야산과 벌방지대는 물론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던 곳들에 둥지를 틀고 한곳에서 사는 사철새인것과 함께 일상적으로 사람들의 생활과 매우 가까운것과 관련되여있다.

이처럼 조선사람들이 남긴 력사자료와 미술유산들, 문학작품과 속담들을 통해서 까치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속에 널리 알려지고 친숙해진 길한 새였으며 이러한 력사와 전통을 가지고있는 까치가 오늘 조선의 국조로 정해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