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40년만에 제대로 세워진 묘비에 깃든 사연

 2021.4.1.

한평생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빛나는 생애를 돌이켜볼 때마다 우리모두의 가슴속에 뜨겁게 안겨오는것은 어버이수령님의 한없는 겸허하고 소박하신 풍모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혁명가적풍모에 있어서나 인간적풍모에 있어서나 그 누구도 견줄수 없는 위인중의 위인이시다.》

오늘 조선인민의 마음의 고향 만경대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선생님과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 강반석녀사의 묘소를 찾아 경의를 표하군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께서 나라와 민족앞에 이룩하신 업적과 고결한 인품, 덕망에 비하면 묘소가 너무도 평범하고 소박한것으로 하여 한없이 숭엄한 감정에 휩싸이군 한다.

하지만 그 소박한 묘비조차 1980년대에 와서야 세워지게 된것이였다.

원래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유해를 이국땅에서 모셔다 만경대에 안치한것은 주체36(1947)년 여름이였다.

인민들은 그때 벌써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를 잘 꾸릴것을 일치하게 제기하였고 그에 따라 김책동지를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이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설계한 안에는 비눈물에 묘소가 씻기지 않도록 그우에 벽체가 없이 자그마한 지붕을 씌우고 묘비도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크게 할것으로 예견되여있었다.

이 사업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모르시게 진척되였다.

후날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곧 김책동지를 부르시여 부모님의 묘소를 꾸리는 사업을 당장 그만둘것을 단호하게 지시하시였다.

일이 이렇게 될것을 예견하였던 김책동지가 위대한 수령님께 인민들의 심정을 루루이 말씀드렸으나 수령님께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였다.

그렇게 하는것이 결코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며 우리 인민을 위한 일도 아니라고 거듭 김책동지를 설복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중에 절절하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허례허식을 반대하고 일생을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하면 부모님뜻에도 맞지 않는다고 교시하시였다.

일군들은 그러면 묘비만이라도 원래의 안대로 만들어 세우겠다고 청을 드렸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제의마저 받아들이지 않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여 친히 묘소꾸리는 사업을 료해하시며 조금이라도 색다르게 될가보아 못내 념려하시였다.

그리하여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성의와 념원에도 불구하고 만경대에는 그야말로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묘비가 세워지게 되였다.

그러나 조국해방전쟁시기 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으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만경대도 혹심한 피해를 입게 되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원쑤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안으시고 다시 비돌을 마련하기 시작하시였다.

비문에 깃든 사연을 잘 알고있던 만경대인민들도 적극 도와나섰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다음해 봄에는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앞에 새로 묘비를 해세울수 있었다.

그러던 주체43(1954)년 10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현지지도의 길에 짬시간을 내시여 만경대에 들리시였다.

가렬한 조국해방전쟁기간 한번도 만나뵙지 못한 조부모님들을 잠간이라도 만나뵙고 안부를 알아보시기 위해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할아버님과 할머님께서 전쟁시기에 겪으신 고생에 대하여 위로해드리시고 삼촌과 함께 마을을 돌아보시였다.

부모님의 묘소에 세운 묘비앞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때 묘비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 묘비는 언제 세웠는가고 물으시였다.

삼촌은 묘비를 다시 세우게 된 경위와 갑자기 하다보니 묘비가 잘 되지 않았다는것을 알려드리면서 이제 묘비를 다시 잘 고쳐 세워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삼촌은 그때까지도 위대한 수령님의 부모님묘소에 묘비를 제대로 해세우지 못한 죄책감으로 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던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새로 세운 묘비에 대하여 물으신것은 결코 그런 뜻에서가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삼촌에게 지금 전쟁을 방금 겪고나서 인민들이 아직 토굴집에서 나오지도 못했는데 무엇이 바빠서 묘비를 고쳐세우도록 하였는가고, 이런 일이야 인민들의 생활이 좀 펴인 다음에 해도 얼마든지 할수 있지 않는가고 신중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 삼촌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있다가 이윽해서 그래도 옆에 사람들이 있으면서 어떻게 상한 묘비를 그냥 두고있겠는가고 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말씀드렸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묘비문제를 가지고 그 이상 더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막아버리시고 자리를 뜨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이 하도 강경하시니 삼촌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후에는 감히 묘비를 다시 고쳐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인민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여 매일처럼 찾아오는 우리 인민들과 세계 진보적인민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님의 부모님묘소가 제대로 꾸려지지 못한데 대하여 못내 유감의 뜻을 표시하군 하였다.

하여 내외인민들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우리 일군들은 주체48(1959)년 봄을 맞으며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비를 더 정중히 꾸리게 되였다.

그러나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보다 크게 달라진것은 없었다.

묘소주위에 깔았던 자갈대신에 세멘트판석을 입히고 묘비도 비돌의 색갈이나 돋군것이 전부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알아보시지 못하도록 하려는 일군들의 조심성이 작용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일은 일군들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았다.

주체48(1959)년 8월 중순의 어느날 만경대에 나오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간만에 부모님의 묘소를 찾으시였다가 그전과 달라진 점들을 대뜸 알아보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묘지를 무엇때문에 이렇게 꾸렸는가고, 종전에 소박하게 자갈을 깔았을 때보다 오히려 못하다고 하시면서 주변에 깐 판석들을 당장 거둘데 대하여 엄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자신의 승인이 없이는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하겠다고 강조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 인민들이 그처럼 마음속깊이 우러르는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는 그후 20년이 지나도록 인민들의 념원대로 꾸려지지 못하고있었다.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였다.

대성산혁명렬사릉을 새로 개건확장하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우리 인민들과 세계 혁명적인민들의 한결같은 성의와 념원을 담아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에도 반신상을 해세우게 되였던것이다.

참으로 40년만에야 제대로 세워진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비에는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이 겸허하고 소박한 인민적풍모를 후세에 길이 전하는 뜻깊은 사연이 깃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