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우리
오늘 조선인민의 마음의 고향 만경대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그때마다 사람들은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께서 나라와 민족앞에 이룩하신 업적과 고결한 인품, 덕망에 비하면 묘소가 너무도 평범하고 소박한것으로 하여 한없이 숭엄한 감정에 휩싸이군 한다.
하지만 그 소박한 묘비조차 1980년대에 와서야 세워지게 된것이였다.
원래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유해를 이국땅에서 모셔다 만경대에 안치한것은 주체36(1947)년 여름이였다.
인민들은 그때 벌써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를 잘 꾸릴것을 일치하게 제기하였고 그에 따라 김책동지를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이 이 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설계한 안에는 비눈물에 묘소가 씻기지 않도록 그우에 벽체가 없이 자그마한 지붕을 씌우고 묘비도 전통적인 풍습에 따라 크게 할것으로 예견되여있었다.
이 사업은
후날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신
일이 이렇게 될것을 예견하였던 김책동지가
그렇게 하는것이 결코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며 우리 인민을 위한 일도 아니라고 거듭 김책동지를 설복하시던
일군들은 그러면 묘비만이라도 원래의 안대로 만들어 세우겠다고 청을 드렸다.
하지만
그리하여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성의와 념원에도 불구하고 만경대에는 그야말로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묘비가 세워지게 되였다.
그러나 조국해방전쟁시기 침략자들의 야수적만행으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만경대도 혹심한 피해를 입게 되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원쑤들에 대한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안으시고 다시 비돌을 마련하기 시작하시였다.
비문에 깃든 사연을 잘 알고있던 만경대인민들도 적극 도와나섰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난 다음해 봄에는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앞에 새로 묘비를 해세울수 있었다.
그러던 주체43(1954)년 10월 어느날
가렬한 조국해방전쟁기간 한번도 만나뵙지 못한 조부모님들을 잠간이라도 만나뵙고 안부를 알아보시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의 묘소에 세운 묘비앞에 이르신
삼촌은 묘비를 다시 세우게 된 경위와 갑자기 하다보니 묘비가 잘 되지 않았다는것을 알려드리면서 이제 묘비를 다시 잘 고쳐 세워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삼촌은 그때까지도
하지만
하지만
그러나 인민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하여 내외인민들의 간절한 소원을 담아 우리 일군들은 주체48(1959)년 봄을 맞으며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비를 더 정중히 꾸리게 되였다.
그러나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보다 크게 달라진것은 없었다.
묘소주위에 깔았던 자갈대신에 세멘트판석을 입히고 묘비도 비돌의 색갈이나 돋군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일은 일군들이 바라는대로 되지 않았다.
주체48(1959)년 8월 중순의 어느날 만경대에 나오시였던
이렇게 되여 우리 인민들이 그처럼 마음속깊이 우러르는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는 그후 20년이 지나도록 인민들의 념원대로 꾸려지지 못하고있었다.
인민들의 간절한 소망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였다.
대성산혁명렬사릉을 새로 개건확장하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우리 인민들과 세계 혁명적인민들의 한결같은 성의와 념원을 담아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소에도 반신상을 해세우게 되였던것이다.
참으로 40년만에야 제대로 세워진 김형직선생님과 강반석녀사의 묘비에는 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