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묘향산 보현사비

 2024.7.5.

조선의 명산 묘향산에는 보현사라고 불리우는 오랜 절이 있다. 보현사는 력사가 오랠뿐 아니라 규모가 크고 력사유적유물이 많아 유명하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묘향산에 있는 문화유산은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과 훌륭한 예술적기교를 잘 보여주고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보현사는 11세기초의 우리 나라 건축술을 대표하는것으로서 예술적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입니다.》

묘향산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의 하나인 보현사는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과 예술적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고있다. 이 보현사의 오랜 력사와 건립경위를 전하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 묘향산 보현사비이다.

보현사비는 보현사를 세운 다음 이 절이 건립되게 된 과정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고려시기에 세운것이다. 현재 보현사의 기본건물의 하나인 만세루앞에 세운 비각안에 보존되여있다.

보현사의 비각
사진 1. 보현사의 비각

비는 네모난 받침돌과 비몸으로 되여있는데 비몸의 웃부분은 귀접이한 여덟팔자모양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2.45m이고 너비는 1.12m이며 비몸의 앞뒤에 다 글자가 새겨져있다.

이 비의 건립년대는 1141년 7월 11일이며 묘향산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보현사라는 절이 건립되게 된 과정이 기록되여있다.

비문에 의하면 묘향산에 처음 절을 세운 사람은 탐밀이라는 중이다. 황주사람인 탐밀은 1028년에 연주산속으로 들어와 절을 짓고 불교교리를 터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후 10년이 지난 1038년에 탐밀의 조카인 굉곽이 여기로 와서 그의 제자로 되고 함께 불교의 한 교파인 화엄교를 탐구하였다. 이때로부터 이 절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였으며 여기로 찾아오는 중들이 차츰 많아졌다.

그리하여 1042년에는 본래의 절 동남쪽에 다시 터를 잡고 243간의 큰절을 지었다. 그리고나서 산이름을 비로소 묘향산이라 부르고 절을 보현사라고 하였다. 그후부터 보현사에서는 300여명의 중들이 모여 밤낮없이 불경을 익히였다.

이상과 같은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묘향산이라는 산이름과 보현사라는 절의 이름이 탐밀, 굉곽에 의하여 1042년경에 처음 생겨났다는것을 알수 있다.

보현사비
사진 2. 보현사비

묘향산은 옛날에 향산, 백산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탐밀과 굉곽이 《묘》자를 덧붙여 《묘향산》이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묘》자를 즐겨쓴다. 불교도들은 《묘》를 흔히 정상적인 리치로서는 추측하거나 생각할수 없는것, 더 이상 비길데도 없고 그보다 더 나을수도 없는것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그리고 보현이란 불교의 교리를 널리 터득하고 모든 훌륭한 《덕》을 체현하였다는 뜻으로서 부처를 가까이에 모신다는 보살의 이름이다.

이처럼 산이름을 묘향산이라고 한것은 산의 경치가 비길데없이 아름답고 황홀하다는데서 온 이름이며 절의 이름은 불교의 리치를 가장 넓고 깊게 깨달을수 있다는데서 불리워진것이다.

비문에는 보현사가 세워진 뒤로 100년세월이 흐른 동안에 생겨난 페단에 대하여서도 지적하고있다.

비문을 통하여 보현사의 건립년대와 건립당시의 규모, 고려봉건정부와의 유착관계, 중들의 탐욕성과 착취상을 알수 있다.

묘향산 보현사비의 비문은 묘향산과 보현사의 연혁을 보여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것으로 하여 의의가 있으며 인종의 필적이 남아있고 당대의 이름난 문필가 김부식이 지은 비문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문화사적가치도 있다.

이 비의 정면에는 총알에 패인 자리가 여러군데나 나있는데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침략자들의 기총탄에 맞은 자리이다. 이것은 미제침략자들이야말로 인류문화의 파괴자라는것을 증시하여준다.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원상대로 복구된 묘향산 보현사는 선조들이 이룩한 훌륭한 건축술과 뛰여난 예술적기교를 자랑하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으로 더욱 빛을 뿌리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