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민족의 자랑 - 고구려의 종이

 2016.12.3.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민족의 재보이며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김정일전집 》 제3권 125페지 )

우리 선조들은 인류보물고를 풍부히 하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수많이 남겨놓았다.

그가운데서도 고구려시기의 종이는 고구려사람들의 창조적재능과 문명정도를 평가하는 우리 민족의 매우 귀중한 문화적재부의 하나이다.

종이는 력사발전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히 련결되여있었으며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물건이였다.

인류는 수많은 력사적사실들과 문화적재부들을 종이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면서 인류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우리 선조들은 이미 고조선시기부터 종이생산기술을 발명하고 발전시켜왔다.

고조선을 이어 고구려시기에도 우리 선조들은 종이생산기술을 계속 발전시켰으며 여러가지 질좋은 종이를 생산하여 사회생활의 여러 분야에 리용하였다.

고구려시기 종이와 관련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고구려시기의 종이유물이 알려졌다.

고구려시기의 책과 종이유물이 대성산성에서 발굴되였다.

대성산성에서 발굴된 책유물은 장수봉 서남쪽기슭 《행궁》터로 볼수 있는 건물터뒤쪽 돌성벽이 무너져내린 속에서 발견되였다.

책은 석회석종류의 돌을 파서 만든 돌함속에 들어있는 상태로 나왔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밑부분과 웃부분은 습기를 받아 썩고 서로 엉키여 덩어리가 되였거나 가루로 되였고 가운데부분만 약간 엉키여 남아있었다.

책의 엉켜붙은 무게는 50g, 가루무게는 235g이다. 엉켜붙은 책갈피를 하나하나 떼여 약 100페지정도 복원할수 있었다.

종이의 매질은 매우 치밀하게 결합되여있었으며 색갈은 회색인데 진한 곳과 연한 곳이 있는것으로 보아 원래는 흰색이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부식과정에 색이 일정하게 변한것으로 보인다. 표지는 종이를 여러겹 붙이였고 진한 청색을 칠하였다.

책장의 줄칸과 글씨는 붓을 가지고 금박으로 썼으며 글씨는 해서체이다. 알아볼수 있는 글자는 근 1 050자인데 글자들을 해석하여 보면 《석가모니》, 《여래》, 《보살》, 《사파》, 《…경명묘법…》, 《…화경》 등 부처나 불교와 관계되는 글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불교경전의 한 종류인 《묘법련화경》으로 볼수 있게 한다.

유물이 나온 장소로 보나 그것이 들어있는 돌함이 이미 고증된 고구려시기의 유물인 불상의 돌함과 같은 점이 많은것으로 보아 이 책은 고구려시기의 책이 분명하다.

이 책을 만드는데 쓰인 종이가 어떤 섬유로 만들어졌는가를 분석한 결과 닥나무껍질섬유로 만들어졌다는것이 확증되였다.

고구려시기 종이유물은 천과 종이로 불상을 싸서 돌함에 넣은것이 대성산성에서 발견된것이다.

이 유물은 대성산의 국사봉남쪽경사진 곳에 있는 산성벽이 무너진 돌더미속에서 발견되였다.

돌함에서 나온 종이는 조각상을 소중히 보관하기 위하여 싸는데 썼던것으로 보인다.

종이는 식물성섬유를 가지고 만든것이였다. 썩어서 모두 갈색으로 되였으므로 원래의 색갈과 구체적인 상태에 대하여서는 잘 알수 없다.

고구려시기 종이유물은 평양 모란봉동쪽(청암동) 대동강반의 절벽에서도 금동투각장식유물과 함께 발견되였다.

발굴된 종이의 섬유들은 매우 고르롭고 치밀하게 엉켜져있었으며 면이 매끈하고 질기였다. 그리고 종이의 색도 발굴당시까지 눈같이 흰색을 보존하고있었다.

이 종이를 분석한데 의하면 삼섬유를 리용하여 만들었다는것이 확정되였다 .

다음으로 고구려의 종이는 고구려무덤벽화들에서도 보인다.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3호무덤의 벽화에는 왕에게 보고하는 신하가 글줄이 있는 책을 두손으로 들고있는 장면과 주인공의 명령을 종이에 기입하는 장면이 있다.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무덤벽화에는 말타고 활을 쏘는 경기성적결과를 종이에 기록하는 사람이 그려져있다.

그리고 고국원왕무덤벽화, 약수리무덤벽화, 덕흥리무덤벽화의 행렬도들에 종이로 만든 등릉을 어깨에 멘 등릉수들이 보이며 집안 4호무덤과 5호무덤의 벽화들에는 종이로 만든 소의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인물들이 그려져있다.

이처럼 고구려시기의 유적들에서 발굴된 종이유물들과 무덤벽화자료들을 통하여 당시 고구려에서는 삼뿐아니라 가장 우수한 종이원료의 하나인 닥나무가 종이생산에 쓰이였고 그 기술도 대단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으며 종이가 널리 보급되여 사회생활령역에서 많이 쓰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고구려시기 종이는 문화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발전된 종이생산기술에 기초하여 여러가지 책들을 만들어 널리 리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건국초기부터 《류기》라는 력사책 100권을 썼는데 A.D.600년에 태학박사 리문진이 그것을 정리하여 《신집》 5권으로 편찬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전해지고있다.

나라의 초창기에… 문자를 상용할 때에 어떤 사람이 기사 100권을 쓰고 그것을 류기라고 하였다.

고구려에서 책이 널리 보급되고 학문이 깊이 연구된데 대하여 중국의 력사책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여있다.

풍속이 서적을 자랑하며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까지도 각각 거리에 큰 집을 짓고 경당이라고 하여 자제들이 결혼전에 밤낮으로 여기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힌다…

리덕무(1741 - 1793)의 책인 《기년아람》의 서문에는 당나라의 리적이 서적을 평양에 모아놓고 그 문물이 중국보다 못하지 않다는것을 꺼려하여 모두 불질렀다는 내용이 서술되여있다.

고구려시기에 발전된 종이생산기술과 책들은 그 이후 복잡한 력사적과정을 걸치면서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그의 진면모를 더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고구려사람들이 당시 만들어낸 종이가 지금도 종이를 만드는 기본원료인 닥나무나 삼을 가지고 만들었다는것으로 하여 세계 그 어느 나라들보다도 일찌기 종이생산기술을 발전시켰고 문명의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고구려사람들이 일찌기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 종이생산기술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우리 인민들로 하여금 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