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신은 통신과 방송으로 사회 여러 부문의 발전을 추동하고 인민들의 생활과 복리증진에 이바지하는 인민경제의 중요한 부문입니다.》
체신은 나라의 신경이다고 말할수 있다. 사람이 신경이 마비되면 창조적인 활동을 할수 없는것처럼 체신이 자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국가사회생활전반에서 커다란 지장을 받게 된다.
체신안에서도 우편통신은 사회의 모든 부문들과 인민들이 널리 리용하는 중요한 대중통신수단이다.
근대시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우편통신사업에 직접적으로 리용되고 중요한 역할을 논 《문위》우표가 발행되였다.
우선 1870년대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은 우리 나라 우편제도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였다.
당시 개화파들은 사회가 근대화의 길로 나가는 현실적요구에 비추어볼 때 봉수나 역참과 같은 낡은 중세기적인 통신수단을 가지고서는 발전하는 시대에 따라갈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수도 한성과 각 개항장들에서 자본주의렬강들이 리용하는 새로운 통신시설들과 대비해볼 때 낡은 통신제도를 그대로 둔다는것은 나라를 세계적발전추세로부터 멀리 뒤떨어지게 하는것으로 되였다.
그리하여 개화파들은 봉건정부의 중요관직을 차지하고있는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다른 나라들에 나가 실태를 료해하면서 우리 나라에서도 근대적인 통신활동을 벌려나가기 위한 준비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갔다.
개화파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1884년 4월 22일에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근대적인 통신기관인 우정국이 설립되게 되였으며 그 총판으로 홍영식이 임명되였다.
홍영식은 1884년 9월 11일에는 우정국과 관련한 각종 규정과 세칙들을 작성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우표를 발행하기 위한 사업도 적극 추진시켜나갔다.
또한 이 시기에 개화파들은 우리 나라에서 첫 우표를 발행하여 우편통신활동에 리용하였다.
1884년 10월 1일에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문위》우표 2종이 발행되였다.
《문위》우표란 당시 우표에 표시한 액면단위가 《문》이라는데로부터 후세에 우표수집가들이 붙인 이름이였다.
이 우표에 표시된 공식명칭은 《대조선국우초》(大朝鮮國郵抄)였다.
원래 《문위》우표는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 등 5종을 인쇄하게 되여있었으나 5문, 10문 등 2종만이 먼저 인쇄되여 한성과 인천사이의 우편통신에 사용되였다.
개화파에 의하여 발행된 《문위》우표는 우리 나라의 첫 우표로서 한성과 인천사이의 우편통신활동에 20일간 사용되였다.
그 사용기간은 1884년 10월 1일부터 1884년 10월 19일까지였다.
《문위》우표의 도안에는 액면을 표시하는 수자와 함께 글자가 무늬밖에 서로 대칭되게 그려졌다.
《문위》우표의 초안에 대하여 어느 한 자료에는 《우표의 초안은 여러가지 무늬에 기초하여 그렸다.》고 밝히고있다.
우표도안을 구체적으로 보면 5문우표에는 중심웃부분에 한자로 《대조선국우초》라고 쓰고 그 밑에 조선글로 《대죠션국우초》라고 밝히였다.
옆에는 한자로 액면을 밝히고 웃부분에 있는 2개의 원에는 조선글로 그 액면을 밝혔다.
이 우표에는 영문표기글자가 없었던것으로 보아 국내에서의 사용을 목적한것으로서 일반우표였다고 할수 있다.
10문우표에는 중심웃부분에 영문으로 《COREAN》(조선)이라고 씌여져있으며 량쪽옆에는 다시 영문으로 《Post》(우편)라는 글이 씌여져있다.
바깥원우에는 한자로 《대조선국우초》라고 썼으며 아래쪽에는 그것을 조선말로 《대죠션국우초》라고 썼다. 량쪽웃모서리에는 조선글로 액면을 밝혔다.
25문우표에는 중심우에 한자로 《대조선국우초》라는 글과 함께 웃쪽모서리에 액면을 주었는데 모든 글자는 조선글 《대죠션국우초》로 주었다.
중심원안에 있는 글자는 한자로 썼으며 원의 아래쪽에는 한자로 액면을 주었다.
아래모서리에는 영어로 액면을 주고 중심에는 《조선우표》라는 글을 주었다.
50문우표는 중심우에 《대조선국우초》라는 글과 함께 웃쪽모서리에는 액면을 조선글로 주었다. 3개의 타원형부분에는 한자로 썼으며 량옆의 타원에는 액면을 주었다. 아래에는 영어글자가 가로 씌여져있다.
100문우표는 50문우표와 같은데 액면을 두가지 색으로 인쇄하였으며 밑에 있는 액면글자는 아라비아식으로 씌워져있었고 큰 꽃모양으로 장식되여있었다.
《문위》우표는 공식명칭을 모두 《대조선국우초》라고 표시하였는데 이 우표에서는 우표를 우초라고 표기하였다. 여기서 《초》(抄)는 화페를 의미하는것이기때문에 이것은 당시 우표발행을 주관한 개화인사들이 우표를 나라의 증권으로 리해하고있은것과 관련된다고 볼수 있다.
《문위》우표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의 인쇄발전수준이 미약하였던 사정으로부터 외국에 의뢰하여 제작한것이였다.
인쇄된 《문위》우표는 인쇄방법상 전기활판인쇄였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우표를 생산할 때 일반적으로 쓰던 방법이였다.
우표의 규격은 너비 23㎜, 길이 26㎜이며 중심여백의 넓이는 3㎜이다.
우표는 인쇄전지당 80(10×8)매씩이였으며 종이의 재질은 주로 벼짚에 잡관목을 약간 섞어 만든것으로서 이것은 당시 우표인쇄에서 가장 적합한 종이로 알려져있었다.
천공은 단선바늘로 한면씩 하였다.
《문위》우표의 수량은 5문우표가 49만부, 10문우표가 99만 5 000부, 25문우표가 49만 7 500부, 50문우표가 49만 8 500부, 100문우표가 29만 9 000부 합계 278만부였다.
《문위》우표는 1884년 10월 17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직전에 5문, 10문우표가 일정하게 반입되여 우편활동에 리용된 후 정변의 실패로 그 사용이 완전히 중단되게 되였다.
《문위》우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그 발행이 중지되였지만 그 형태나 사용의 특성으로 하여 당시 국제우표계에서 일정한 관심을 모으고있었다.
1885년 6월 프랑스에서 발간된 어느 한 우표신문에는 우리 나라에서 발행한 우표에 대하여《2개의 우표들에는 꽃무늬가 있고 조선어가 씌여져있으며 천공이 있다. 장미색과 푸른색우표가 갓 도입되기 시작한 조선은 프랑스의 3분의 1에 해당한 나라인데 중국 만주리와 일본사이에 위치하고있다. 주민은 800만이고 수도는 한양이다. 기본생산품은 벼, 알곡, 명주이며 특히 종이는 많은 량을 중국에 수출하고있다.》고 하면서 《이 시기에 사용한 소인우표는 수천프랑의 값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우표들이 우편물에 사용된 기간이 얼마 되지 않기때문이다. 발행된지 며칠후에 전쟁이 나라를 삼켜버렸기때문이다.》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문위》우표는 그 사용기간이 매우 짧은것이였지만 우리 나라에서 사용된 첫 우표로서 근대적우편제도의 수립과 그 실제적운영과정에 자기의 자리를 뚜렷이 차지한것으로 하여 일정한 의의를 가지였다.
그러나 근대시기의 《문위》우표들은 내용과 형식에서 조선봉건왕조를 미화한 계급적제한성을 가지고있었다.
그것은 사회발전의 특수성으로 하여 발행에서 일관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지 못한것과 함께 우표도안과 인쇄에서도 다른 나라의 기술을 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등 여러가지 제한성이 나타난데서 찾아볼수 있다.
이처럼 근대시기에 우리 나라는 세계적인 우편통신발전에 편승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문위》우표를 발행하여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