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있는 금수강산인 우리 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자랑할만 한 우수한 력사유적들이 많다.
특히 개성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옛 도읍지로서 오랜 력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개성은 우리 나라의 옛 도읍지로서 고적과 유물들이 많은 곳입니다. 고적과 유물들은 우리 인민의 귀중한 문화적재부입니다.》 (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당시 정치와 경제, 문화발전의 중심지였으며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도시였다.
이런데로부터 개성에는 고려시기에 창조된 력사유적과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여있으며 그가운데서 오늘까지 전해오고있는것들도 적지 않다. 그중에는 고려시기의 돌다리인 선죽교도 있다.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에 위치하고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다리는 1216년이전에 건설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선지교였다. 그후 고려왕조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가 1392년 리성계일파에게 피살된 날 밤 다리옆에서 참대가 솟아났다고 하여 그때부터 다리이름을 선죽교라고 고쳐부르게 되였다.
선죽교는 화강암을 다듬어 만들었다. 다리에 두른 란간의 너비는 2.54m이며 길이는 6.67m이다. 다리의 구조는 기둥돌과 판돌, 란간돌로 이루어졌다. 사람이 밟고다니는 다리면의 판돌 웃면은 평평하게 하고 밑면은 가운데를 두껍게, 량옆은 그보다 좀 얇게 하였다. 이것은 긴 판돌을 두 기둥에 걸쳐놓고 그우에 짐을 실었을 때 두 가녁보다 가운데가 힘을 더 많이 받는다는 사정을 고려한것이다.
정몽주의 후손 개성류수 정호인은 1780년에 이 다리를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건너다니지 못하게 다리 앞뒤로 네개의 돌을 세운 다음 그 남쪽으로 잇대여 사람들이 다닐수 있는 다른 다리를 만들어놓았다. 그후 1796년 개성류수 조진관이 다시 선죽교에 란간을 설치하였다.
선죽교에는 정몽주가 흘린 피자욱으로 전해지는 불그스레한 판들이 있다.
선죽교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의 옛 문인들과 명장들이 많은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여 후세에 남이였다.
그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옛 시들이 오늘까지 우리 인민들속에 전해져오고있다.
선죽교에 흘린 피
사람들과 함께 나도 슬퍼하노라
그러나 신하된 몸 나라가 망하면
죽는 길밖에 또 무엇이 있으랴
번화롭던 옛일은
꿈결로 사라지고
춤추고 노래하던 집들
허물어져 잡초만 우거졌네
오직 이 선죽교만이
말하여주고있는가
5백년 고려왕업과
문충공(정몽주)의 굳은 절개를
산천은 예같으나
조정은 갈렸구나
나라잃은 슬픈 노래
그 얼마나 울렸던고
지는 해 옛성터
봄풀 우거진속에
아직도 정공의
비석만은 우뚝 서있구나
비록 정몽주는 봉건적충의사상을 지닌 봉건관료의 전형으로서 고려왕조를 위해 목숨으로 신하의 의리를 지킨데 불과하지만 불의앞에 절대로 굽히지 않은 그의 의로운 행동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의 찬사의 대상으로 되여왔다.
선죽교는 지금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돌다리가운데서 가장 오랜것의 하나로서 당시의 건축술과 돌가공기술을 연구하는데 참고로 된다.
이렇게 파란많은 력사와 건축술을 전하는 선죽교도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더욱 빛내주시려고 끊임없는 심혈을 기울여오신
주체81(1992)년 5월 5일 80고령의 년로하신 몸으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