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녀성들이 가정의 꽃, 생활의 꽃, 나라의 꽃으로 활짝 피여나 우리 당을 따르는 한길에 자기들의 깨끗한 마음과 불타는 열정을 다바쳐가고있다.
지난날 세기를 두고 내려오던 봉건적억압과 굴욕, 멸시와 속박에서 한생을 눈물속에 보내야만 했던 우리 녀성들은
그러한 녀성들속에는 조선예술영화 《어머니는 포수였다》의 원형인 리수덕녀성도 있다.
《1947년이 저물어가던 때에 강원도 평강군의 이름난 포수 리수덕부부는 자기들이 잡은 범의 가죽을
해방전 리수덕녀성은 지주집머슴의 딸로 태여나 눈물겨운 고생살이의 시작을 떼였다. 일제순사의 폭행으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던 그들이 발을 붙였을 때 리수덕은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수 없이 남자들도 감히 나서기 저어하는 산짐승사냥에 남편을 따라 나서게 되였다. 사나운 짐승앞에 나서서 목숨을 내대는 판가리싸움도 해보고 며칠씩이나 산을 헤매야 하는 모진 고생속에서 다시는 맹수사냥에 나서지 않기로 결심하기도 하였지만 수난많던 그 세월 그로서는 어찌할수가 없었다.
마을에서는 《치마 두른 녀인이 산에 싸다니면 사나운 산짐승들이 더 끓인다.》고도 하고 《녀자가 할 일이 없어서 사냥을 하는가.》고도 하면서 별의별 말을 다 하였다.
그러나 입에 풀칠을 하자니 다른 도리가 없어 가난에 쪼들리는 설음에 녀자로 태여난 설음까지 겹쳐들어 눈물을 머금고 피눈물나는 생활을 계속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세월이였다.
리수덕부부가 착취와 억압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참된 삶을 누릴수 있게 된것은
해방된 조국에서 그들의 처지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져 토지개혁의 혜택으로 5 000여평이나 되는 땅을 분여받고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되였으며 리수덕녀성은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누리는 행복이 커만갈수록 리수덕녀성의 마음속에는 우리 인민에게 새 삶을 안겨주신
주체36(1947)년 마가을 철원의 어느 한 산골짜기에서 잔등이 두발이나 되는 칡범이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는것을 알게 된 그는 이 범을 잡아 행복의 은인이신
새조국건설로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녀성은 살아가기 위해 녀자의 몸으로 사냥을 하면서 수모를 받던 일이며 다시는 사냥의 길에 나서지 않기로 결심하던 일 등을 죄다 말씀드리였다.
그러시고는 조선녀성들은 소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용감하고 대담하다고, 우리 녀성들이 모두다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선다면 실로 큰 일을 할수 있다고 하시면서 해방된 조선의 녀성들은 남자들과 함께 새 조국건설의 튼튼한 기둥이라고 믿음어린 어조로 교시하시였다.
조국땅에 전쟁의 불길이 일자 리수덕녀성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청장년들이 모두 전선으로 나가고 몇명 안되는 녀성들과 나이많은 사람들만 남아있는 조건에서도 전체 인민이 하나같이 떨쳐나 싸우면 그 어떤 적들도 능히 타승할수 있다고 하신
리수덕은 평강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주체39(1950)년 10월에는 적의 군수렬차를 습격하여 71명의 적을 살상하였으며 10월 29일에는 적치안대본부를 습격하여 10여명의 애국자들을 구원하였다.
주체40(1951)년 4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수덕녀성은 전쟁이 승리하는 날까지 용감히 싸웠으며 전후에는 제4기
중앙인민위원회정령에 따라 그가 살던 강원도 림단리를 리수덕리로, 원산교원대학을 리수덕원산교원대학으로 고쳐 부르고있다.
이렇듯 나라없던 그 세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속에서 숨어만 살면서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만을 받아오던 리수덕녀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