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에서 력사적인 공적을 세운
《리순신
우리 민족사의 갈피에는 왜적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임진조국전쟁시기 뛰여난 해상전법과 전술로 왜적의 함대에 심대한 참패를 안기고 전쟁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한 애국명장 리순신(1545-1598)도 있다.
자는 여해, 본은 덕수, 시호는 충무이다.
리순신은 1545년 3월 한성의 가난한 선비인 리정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고 매사에 부지런하였으며 특히 글공부에서는 남다른 열성이 있었다. 리순신은 글읽기와 붓글씨에 뛰여났을뿐만 아니라 11살에 벌써 《자치통감》과 《대학》, 《중용》 등 4서 3경까지 완전히 떼고 났다.
리순신은 옛장수들의 무훈담을 즐겨 탐독하였으며 더우기 《을지문덕
리순신은 31살이 되던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에서 근무하다가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인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되였다.
수군절도사의 직책을 맡으면서 당시 조성된 정세로 보아 도래할 사변을 깊이 우려하면서 왜적의 침입에 대처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수군을 보충하고 군량을 축적하였으며 무기와 무장장비를 빈틈없이 갖추었다. 특히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새롭게 창안제작한것은 조선함대를 강화하는데서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1592년 5월초 전쟁개시후 처음으로 되는 조선수군과 일본수군과의 바다싸움인 옥포해전에서 왜적의 전함 26척을 격침시켰으며 사천해전에서 적선 12척을 또다시 격침시켰다.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어 당포앞바다에서 적선 21척을 격침, 격파하고 당항포에서 30여척의 적선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리순신
한산도해전은 유인, 포위, 총공격전술이 가장 빛나게 실현된 전투였다.
와끼자까의 적 수군함대가 정박해있는 견내량은 바다의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아군의 거북선이나 판옥선같은 큰 배들이 자유롭게 활동할수 없었을뿐 아니라 적이 쉽게 도망칠수 있는 불리한 곳이였다.
그리하여 리순신
이 격전에서 조선함대는 적함 73척가운데서 도망친 14척을 제외하고 포위진에 든 적선 59척을 완전히 격침하고 수천명의 적을 살상하였다.
한산도해전의 승리는 임진조국전쟁국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하여 적들의 수륙병진기도는 완전히 파탄되였으며 적들을 부산일대의 좁은 해역에 옭아놓게 되였다.
조선인민은 이 승리를 《한산대첩》이라고 자랑하여왔다. 리순신
1597년 9월 리순신
1598년 11월 리순신
로량해전에서 싸움이 바야흐로 조선수군의 승리로 끝날무렵 리순신
선조왕은 리순신
7년간이나 계속되던 임진조국전쟁은 로량해전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다.
리순신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수군을 통솔하여 왜적을 소멸하고 민족의 자주권수호에 기여를 한 중세해전사에 이름을 남긴 세계적인 명장이였다.
조국에 바친 애국명장 리순신의 애국지성은 력사에 길이 남아있다.
실학자 리수광은 《충무사》에서 리순신을 찬양하여 이렇게 노래하였다.
거룩하여라 이 나라 구원하신
백절불굴하여 우리 조선 살렸구나
1905년 로일전쟁당시 로씨야의 발뜨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찌로는 전승기념연회에서 《당신이야말로 트라팔가해전에서 련합함대를 격파한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을 릉가하는 군신》이라고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진짜 군신이라고 말할만한 사람은 조선의 리순신
이처럼 리순신은 세상사람들을 크게 놀래운 바다싸움의 명장이였다.
중세해전사에 이름을 남긴 리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