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지봉류설》에 실린 리수광의 애국적경향의 시문학

 2017.10.13.

슬기롭고 지혜로운 우리 인민들은 예로부터 훌륭한 민족문화유산을 수많이 창조함으로써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시위하여왔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통하여 세상에 널리 자랑할만한 문화적재부를 창조하였다. 찬란한 문학예술유산을 가지고있는것은 우리 민족의 크나큰 긍지이며 민족문학예술을 끊임없이 개화발전시켜나갈수 있게 하는 귀중한 밑천으로 된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6권 160-161페지)

우리 민족이 창조한 우수한 민족문화유산가운데는 량반사대부들의 공리공담과 봉건국가의 후진성을 개탄하고 사회적진보와 문명발전을 내용으로 하여 창작된 실학파문학유산들도 있다.

17세기이후 변화된 시대적현실을 반영하여 나온 실학사상에 기초하여 문학활동을 벌린 실학자들가운데는 초기실학파의 대표적인 문인인 리수광(1563-1628년)도 있다.

량반가문에서 태여난 리수광은 일찌기 벼슬길에 올랐고 임진조국전쟁시기 경상방어사 조경의 부대에서 싸웠다.

그후에도 도체찰사 류성룡의 종사관이 되여 전쟁에 참가하였다.

봉건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하면서 임진조국전쟁도 직접 겪었고 또 사신으로 다른 나라에도 여러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 자신의 체험과 보고들은것을 통하여 당시 봉건제도의 락후성을 점차 알게 되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일정한 지식을 가지게 되였다.

이로부터 그는 나라의 발전을 저애하는 사회적페단을 없애기 위하여서는 유교성리학자들의 맹목적이며 고루한 학풍을 배격하는것과 함께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하고 거기에서 옳은 방도를 모색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으며 실사구시적인 학풍을 세울것을 주장하였다.

학문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과 태도는 그의 저서들의 진보적경향을 규정하였으며 동시에 그후 실학적학풍형성을 위한 사상리론적기초를 이루게 되였다.

이러한 선진적인 관점과 립장으로부터 그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자연과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세심하고도 깊이있는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자기의 실사구시적인 사상에 준하여 진보적인 미학적견해들을 제기하고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의 시작품들은 《지봉류설》과 《지봉집》에 실려있다.

그의 저서들에는 문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회정치적 및 미학적견해와 평론들, 시작품들과 기타 산문작품들이 들어있는데 그중에서도 사상예술적가치가 있는 한자시작품들이 적지 않게 올라있다.

그의 시작품들가운데서도 가장 주도적인 경향을 띠고있는것은 애국적경향의 시작품들이다.

《지봉류설》에 실린 애국적경향의 시문학의 특성은 무엇보다먼저 나라를 위해 한몸을 서슴없이 바친 애국적명장과 애국적인물에 대한 찬양이 격조높이 노래되고있는것이다.

시《전사한 통제사 리순신을 애도하여》에서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왜놈수군을 전멸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한 리순신장군을 찬양하면서 침략자들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을 잘 형상하고있다.

위엄높은 그 이름에 원쑤들 전률하고

세상휩쓴 기이한 공 천하에 소문났네

섬오랑캐 도망쳐간 바다엔 달밝더니

장수별 떨어지고 새벽구름 자욱쿠나

파도는 영웅의 한 씻어줄길 없었어도

력사는 전하리라 원쑤친 그 위훈을

오늘날 남아를 누구누구 말해보랴

슬프고나 충의로운 리순신장군이여

시에서는 지난 임진조국전쟁시기 《한산대첩》으로 유명한 애국명장 리순신의 공적을 잊지 못해하는 서정적주인공의 사상감정이 훌륭한 예술적형상으로 노래되고있다.

시인은 그 이름만 들어도 왜놈수군이 벌벌 떨던 리순신장군의 자랑스러운 한생을 긍지와 추억속에 돌이켜보면서 《파도는 영웅의 한 씻어줄길 없었어도 / 력사는 전하리라 원쑤친 그 위훈을》이라는 시적형상을 통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몸 서슴없이 바쳐 싸운 애국명장들의 이름과 위훈은 세월이 흘러도 력사에 남아 길이길이 전해지리라는 확신을 노래하고있다.

이것은 자기 나라의 력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그에 기초하여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시인의 실학적인 관점의 예술적반영으로 볼수 있다.

시《충민사》에서도 리순신장군에 대한 찬양의 감정이 펼쳐지고있다.

조국을 지켜싸운 제일가는 장군이여

갖은 험난 무릅쓰고 우리 나라 건졌다네

산과 강엔 노한 기백 그대로 남아있고

하늘땅엔 영웅의 그 풍격 서려있네

대마도의 파도는 고요히 잠들고

동해의 암운도 어느덧 개였구나

지금도 바다에선 왜적이 엿보나니

누가 다시 원쑤친 장군의 공 이을소냐

시에서 노래된 충민사는 애국명장인 통제사 리순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충민사》에 대하여 리수광은 《지봉류설》15권(인물부, 절의)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통제사 리순신이 임진년에 해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차단하여 왜적의 배들을 여러번 쳐부시고 왜적을 사로잡거나 벤것이 셀수 없이 많았다. 적들은 그가 두려워서 다시는 감히 바다길을 통해서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므로 우리 나라와 명나라가 안전을 회복할수 있게 된것은 다 그의 힘이였다. 무술년(1598) 9월에 왜적들이 도망치려 할 때에 리순신장군은 <이 원쑤들로 하여금 고스란히 살아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바다로 진격하여 적함선에 불을 질러 크게 승리하였다. 그리하여 적들은 쫓겨갔으나 리순신장군은 적탄에 맞아죽었다. 이 지방 인민들이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 나라에서는 순천수영에 나가 그의 사당을 짓고 <충민사>라는 현판을 주었으며 매년 3월상순과 9월상순에 향을 보내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하여 애국명장인 리순신의 공적과 그의 빛나는 최후, 《충민사》가 일떠서게 된 과정을 알수 있다.

시에서 시인은 임진조국전쟁시기 나라의 《갖은 험난 무릅쓰고》 나라를 건진 애국명장 리순신을 《조국을 지켜싸운 제일가는 장군》으로 평가하면서 그의 애국적기백과 영웅의 풍격은 하늘과 땅, 산과 들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노래하고있다.

시인은 왜구들의 침략위험을 대마도의 파도로, 동해의 암운으로 형상함으로써 시의 예술적특성을 보다 높이고있다.

시에서는 리순신장군에 대한 찬양과 함께 바다건너 왜적들이 우리 나라를 또다시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는 현 상황을 제시하여주고 리순신장군과 같이 원쑤들을 무찌르고 큰 공을 세울 사람이 없는 가슴아픈 현실에 대한 시인의 안타까운 심정이 반영되여있다.

이러한 형상은 애국명장 리순신에 대한 찬양을 통하여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음풍영월로 세월을 보내는 당시 량반지배계급의 무능한 처사를 비판하고 국방력의 강화를 시대적인 요구로 제기한 당시 실학자들의 사회개혁적지향의 직접적인 발로이다.

당시의 애국적인 인물에 대한 찬양은 시《일본에 가는 사명산인에게》에서도 표현되고있다.

이 시는 일본에 파견되여 커다란 외교적승리를 이룩한 사명당에 대한 형상을 펼쳐보인 작품이다.

시에서는 서두에 《산인은 곧 중 유정을 말한다. 또 호를 송운이라고도 하였다. 한때 대마도의 왜적들이 조정에 화친을 구걸하기때문에 왜적을 다스리기 위해 유정을 보내여 적정을 탐지하게 하였다.》라는 글을 주고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있다.

태평성대 명장이 많다고 하오만

기이한 공로세움 오로지 그대뿐

배타고 서서히 바다를 건너가

거침없는 웅변술로 지략을 내였지

변화무쌍 림기응변에 왜적들 위압되니

왜적치는 큰일을 위태하다 두려워하랴

허리엔 일장검 위엄있게 찼으니

오늘날 남아들 도리여 부끄럽네

시에서는 임진조국전쟁후 1604년에는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담판을 하였으며 귀국할 때에는 붙잡혀 갔던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을 되찾아 온 사명당에 대한 찬양의 감정이 격조높이 노래되고있다.

시에서 시인의 애국적인 지향은 나라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명당에 대한 찬양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다.

시에서 시인은 《허리엔 일장검 위엄있게 찼으니 / 오늘날 남아들 도리여 부끄럽네》라는 시구를 통하여 어제날의 애국명장들과 애국적인물들을 따라배울 생각을 하지 않고 허송세월하는 당대의 량반들에 대한 안일한 생활풍조를 비판하고있다.

이러한 형상들은 모든것을 실사구시적인 관점에서 보고 평가하며 사회를 《부국유민》, 《리용후생》의 방향에서 발전시키려는 당시 실학자들의 진보적인 사상경향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지봉류설》에 실린 애국적경향의 시문학의 특성은 다음으로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할데 대한 시인의 지향이 노래되고있는것이다.

리수광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나라의 군사제도의 문란상에 대하여 예리하게 비판폭로함과 동시에 병역제도를 개혁하고 군사설비를 개선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킴으로써 일단 유사시에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튼튼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자기들의 문학작품들에서 형상적으로 펼쳐보이였다.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할데 대한 지향은 리수광의 시《북쪽으로 부임하는 백서기를 전송하며》에서 구체적으로 노래되고있다.

조정은 오늘날 변방형세 중히 여겨

좌랑을 선출하니 그대 제일 적임잘세

렬사의 뜨거운 맘 장검속에 비껴있고

장부의 높은 공로 채찍끝에 실려있네

요사스런 무리들 세성에서 일어나면

북치고 피리불어 만리를 평정하리

묘령의 그대보니 이 마음도 늙지 않네

나라일 받들고저 조금도 지체말게

시에서는 나라의 중한 변방형세에 대처하여 좌랑으로 있던 백서기를 선출하여 북쪽변방으로 보내는데 대하여 인재등용을 바로 한데 대한 시인의 립장을 노래하고있다.

시인은 《렬사의 뜨거운 맘 장검속에 비껴있고 / 장부의 높은 공로 채찍끝에 실려있》다고 하면서 만일 세성에서 적들이 침노하면 일거에 평정해버리리라는 굳은 확신을 생동한 시형상으로 펼쳐보이고있다.

시에서는 묘령의 백서기를 보며 나라일을 위해서는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고 부탁하는 서정적주인공의 심정을 노래하면서 군사력강화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하고있다.

이것은 군대제도를 강화하고 무장장비를 개선할것을 비롯하여 군사력을 강화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한 리수광의 진보적인 주장의 예술적반영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는 정서가 다르게 시《정묘년 청명날에》에서는 나라의 국방력이 미약한 탓에 쓰라린 굴욕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당시의 현실에 대한 시인의 우국의 사상감정을 표현하고있다.

절기는 봄철이라 반나마 지나갔네

오늘아침 때식은 찬밥으로 굼땠네

전란이 휩쓸어 세상은 소란하고

천지간에 이내몸 살아가기 어렵네

바다도 노했는가 파도가 울부짖고

하늘도 슬퍼선가 비마저 그치잖네

나라님 곤욕당해 더더욱 상한 마음

신하된 몸 그 어찌 편안함을 구하리오

이 시에서는 나라가 전란을 당하여 침략자들에게 귀중한 강토를 짓밟히던 당시의 상황을 《바다도 노했는가 파도가 울부짖고/ 하늘도 슬퍼선가 비마저 그치잖네》라는 시구를 통하여 보다 강조시키고있다.

시인은 계속하여 당시 군사력이 쇠약한 탓에 《후금》의 침략에 겁을 먹고 쫓겨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던 임금의 곤욕에 대하여 서술하면서 신하된 몸으로서 이를 놓고 어찌 편안함을 구할수 있는가고 안타깝게 노래하고있다.

이 시의 기본사상정서는 군사력이 약하여 《나라님》마저 지킬수 없는 당시의 형편에 대한 비통한 심정이다.

리수광은 이러한 시적형상을 통하여 나라의 국방력강화의 필요성을 보다 강조하면서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한 사회정치적개혁에서 국방력의 강화를 중요한 문제로 제기하였다.

《지봉류설》에 실린 애국적경향의 시문학의 특성은 다음으로 애국적관점에서 지나온 력사를 돌이켜보며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을 무한한 애착과 민족적긍지에 담아 찬양하고있는것이다.

리수광은 우리 나라의 력사와 지리를 연구하면서 국내외의 봉건사가들이 대국주의적 또는 사대주의적관점에서 이러저러하게 외곡한 점들을 사실자료에 기초하여 분석비판하였다.

이러한 활동과정에 리수광은 우리 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다시금 실지 체험으로 느끼게 되였으며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발휘하여 조국산천의 절경을 생동한 시적형상으로 펼쳐보이였다.

조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의 감정은 시《총수산에서 옥류천 보며》에서 뚜렷이 표현되였다.

푸른 빛 기이한 총수의 늦경치

비취색 병풍바위 돌샘은 끼고도네

안개낀 메부리는 천자루 창 세운듯

구름동굴 물뿜는 소리 우뢰인양 요란쿠나

눈서리 물보라 속된 생각 씻어주고

빙옥인양 시원하여 신선 잔을 들이키듯

연연한 이 흐름 려산경치에 비할소냐

내 이제 시 지으니 리태백에 비기랴

시에서는 총수산 병풍바위를 끼고도는 옥류샘앞에서 아름다운 산수를 비유법을 재치있게 활용하면서 생동한 예술적화폭으로 노래하고있다.

안개낀 메부리는 천자루의 창을 세워놓은듯 하고 구름동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는 우뢰와도 같다는 형상은 아름다운 조국산천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자랑을 안고있는 시인의 내적인 체험세계가 아니고서는 펼쳐보일수 없는 훌륭한 시구들이다.

시에서 주목되는것은 시의 마감에 펼쳐보이고있는 《연연한 이 흐름 려산경치에 비할소냐 / 내 이제 시 지으니 리태백에 비기랴》라는 시구이다.

대체로 많은 시인들이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지만 이 시와 같이 다른 나라의 경치와의 관계속에서 우리 나라의 자연경치를 노래한 시는 많지 못하다.

리수광의 실학사상에서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것은 통치배들의 공리공담과 사대적의식을 반대하고 우리 나라의 력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우리 나라 현실에 눈을 돌릴데 대한 내용이다.

이러한 관점을 지닌 그였기에 하나의 자연현상을 놓고도 다른 나라의 이름난 경치도 무색케 하는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을 긍지높이 노래할수 있은것이다.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은 시《릉라도》에서도 노래되고있다.

이 섬을 릉라라함은 비단같아서인가

둘레를 돌아보니 사면은 푸른 강물

솔솔 바람불면 잔물결 무늬지고

락조 비낀 노을은 비단 같구나

시인은 릉라도를 비단과도 같다고 표현하면서 사방 둘러보면 푸르른 강물이 펼쳐져있고 솔바람이 불어오면 강물우에 무늬지는 잔물결을 생동한 시적형상으로 펼쳐보이고 고운 비단과도 같은 저녁노을까지도 짧은 5언절구형식을 빌어 예술적으로 형상하였다.

이밖에도 시《련광정》과 《련광정의 시에 차운하여》, 《새벽에 취승정을 떠나며》와 같은 많은 작품들에서도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실지 보이는듯 생동하게 형상되여있다.

이처럼 리수광은 조국산천에 대한 애착의 감정을 여러 시작품들에 적극 구현함으로써 우리 나라의것을 적극 내세우고 자랑하려는 실학자로서의 자기의 애국적지향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지봉류설》에 실려있는 이러한 애국적경향의 시작품들에는 당대 봉건사회의 페해를 가실데 대한 그의 현실비판적태도와 함께 모든 사물현상을 애국적관점과 립장에서 관찰하여 사회현상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형상으로 창조하려는 그의 실사구시적이며 사실주의적인 창작태도가 집중적으로 반영되여있다.

리수광의 애국적경향의 시작품들은 사상정서적특성에 있어서나 예술성에 있어서 우리 문학유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시작품들로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