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진 슬기롭고 용감한 우리 인민은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세계문화사에 기록될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이루어놓았다. 그 가운데에는 금석문유산의 하나인 북관대첩비도 들어있다.
《북관대첩비와 같은 비가 우리 나라에 있다는것 자체가 우리 민족의 커다란 긍지이고 자랑입니다.》
북관대첩비는 임진조국전쟁시기 함경도지방에서 활동한 정문부의병부대가 북관지방에 침입한 왜적들을 격멸소탕하고 큰 승리를 거둔것을 기념하여 1708년 당시의 길주목 림명(오늘의 김책시 림명리)지방에 세운 승전기념비이다.
북관이란 철령이북지방으로서 오늘의 함경남북도, 량강도 및 강원도의 일부 지역을 말하며 대첩이란 큰 승리라는 뜻이다.
비문에는 정문부가 지휘하는 함경도일대 의병들의 부대결성과 확대 그리고 경성탈환전투, 길주전투, 림명전투, 쌍포전투, 단천전투 등을 비롯한 여러 전투들에서 왜적을 쳐부신 의병들의 투쟁사실과 반역자들을 처단한 사실 등이 기록되여있다.
비문은 서문과 본문으로 되여있는데 서문에는 정문부의병대의 투쟁이 한산도해전이나 행주산성과 연안성싸움에 못지 않게 큰 의의를 가진다고 그 지위를 밝히고 의병대결성과 주요전투들에 대하여 썼다.
또한 패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침략자들을 함경도땅에서 최종적으로 몰아내는 대승리를 거두었다는것과 림명땅에 북관대첩비를 세운데 대하여 서술하였다.
본문에는 왜적들을 반대하여 의병들이 적들을 무자비하게 족치자 그 위력앞에 적들이 넋을 잃고 북쪽땅에서 쫓겨났으며 백성들이 편안히 농사짓게 되였다고 하면서 림명땅에 비를 세워 정문부의병대의 공적을 무궁토록 전한다고 씌여져있다.
1904년 로일전쟁을 계기로 우리 나라에 침입하였던 일제는 1905년에 함경북도 림명지방에서 이 비를 보고 이런 기념비가 이곳에 있으면 조선인민의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조선에 대한 저들의 식민지예속화책동에 불리하다고 하면서 1906년에 극비밀리에 훔쳐 일본으로 빼돌리는 범죄를 감행하였다.
북관대첩비를 저들의 손에 넣은 일제는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하다가 비의 석재와 조각술 등이 매우 아름답고 뛰여나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야스구니진쟈》의 구석진 곳에 숨겨놓으면서 조선인민의 반일애국정신을 짓누른다는 뜻에서 그 우에 1t도 넘는 돌을 짓눌러놓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가 이것을 비밀에 붙였으므로 근 80여년간 흑막속에 묻혀있었는데 1983년 8월 일본의 어느 한 신문이 이 사실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그 진상이 밝혀지게 되였다.
북관대첩비는 일제가 북관대첩비를 도적질해간지 100년만인 2006년 3월에 되찾아 본래의 위치인 함경북도 김책시 림명리에 원상그대로 다시 세워지게 되였다.
또한 북관대첩비를 비롯한 력사유적유물들을 통한 교양사업을 잘하여 우리 인민이 반일애국정신과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지니도록 하여야 한다고 간곡히 가르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 북관대첩비를 참관하러 오는 사람들속에서 비문이 한자로 되여있기때문에 옆에 비문을 번역한 해설문을 따로 만들어 세워 그 내용을 읽어볼수 있게 해달라는 의견이 제기된다는데 그렇게 하면 좋을것이라고 그 관리운영에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