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생을 가극창작을 전문해온 작곡가들조차 가극에 방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직 혁명과 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인민의 지향에 맞게 독창적으로 풀어나가시는
《종래의 가극형식을 가지고서는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사상정신세계와 심리적움직임을 원만히 전달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혁명가극 <피바다>를 창조하면서 방창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 문제를 풀기로 하였습니다. 가극에 방창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것은 가극력사에서 새로운 발견으로 됩니다.》 (
지난 시기 가극에서 음악형상수단이라고 하면 무대에서 불리우는 등장인물들의 노래와 무대밖에서 연주되는 관현악밖에는 없었다.
형상수단이 이렇게 제한되여있다보니 지난 시기의 가극에서는 생활의 론리에 비추어볼 때 관중들에게 어색한 감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 다급한 정황에 부닥치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노래는 고사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무대노래로만 인물들의 사상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틀때문에 지난 시기의 가극에서는 다급한 정황에 부닥친 인물들도 노래를 불러야 하였고 죽어가는 처지에 빠진 인물들도 노래를 불러야 했다.
이러한 형상이 어색하다는것을 가극창작가들은 물론 관중들도 느꼈지만 가극이니까 할수 없다는 식으로 무마해버리군 하였다.
기존관념에 대한 도식적인 사고방식이란 이처럼 무서운것이였다.
이뿐이 아니라 지난 시기 가극에서는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1:1로 노래를 주고받았다.
따라서 가극형상이 매우 단조롭고 따분해질수밖에 없었다.
더우기 모든 노래와 대화창이 무대에 등장한 인물에게만 집중되였기때문에 배우들은 노래와 대화창의 무거운 부담에서 헤여나올수 없었고 따라서 연기를 자연스럽게 할수도 없었다.
그러나 창작가들은 방창이 가지고있는 무궁무진한 형상적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주로 자연을 노래하는 대목에서만 방창을 받아들였다.
그것도 주인공과 교감하면서 방창을 쓴것이 아니라 순수 객관적으로 노래하게 하거나 기껏해서 주인공이 1절을 부르면 방창이 2절을 부르는 식으로 매우 단조롭게 썼다.
대표적인 실례로 혁명가극 《피바다》제2장에 나오는 어머니가 글공부하는 장면을 들수 있다.
어머니의 글소리 밤하늘에 울리고
별들도 이 밤에는 잠들지 않네
꽃으로 피여날 어머니 그 마음
새세상 내다보며 글을 배우네
아 피눈물로 살아온 어머니
한자두자 이 한밤에 글을 배우네
이렇게 3자의 립장에서 울리는 방창은 혁명의 길에 나선 어머니가 혁명을 하자면 배워야 한다는것을 깨닫고 막내아들한테서 글을 배우는 모습과 모자간에 오고가는 살뜰한 정을 깊은 정서속에 그려내였다.
혁명가극 《피바다》를 창조하던 초기에 창작가들은 제5장 감방장면에서 모진 고문으로 운신조차 할수 없는 어머니에게 이른바 감옥장면의 아리야라고 하면서 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꽃정들이 설레이고 유격대로 떠난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윽고 방창이 《일편단심 붉은 마음 간직합니다》로 변하고 그처럼 안아보고싶던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안아보지 못한채 헤여지는 어머니의 심정을 대변하는듯 《광복의 새날에 다시 만나리》선률에 기초한 관현악이 애절하게 울린다.
이렇게 하니 이 꿈장면에서도 누구나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지난 시기 가극에서는 막과 막사이를 련결하고 극을 전개시키는 수단으로 관현악을 흔히 써왔다.
실로 방창의 도입으로 하여 가극의 면모는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였으며 우리 시대의 가극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그 어떤 생활도 다 반영할수 있게 되였다.
바로 여기에 현대가극발전에 기여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