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봉건왕조시기 종이제조의 면모

 2023.3.27.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력사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과 전통도 잘 알아야 한다.》 (김정일전집》제49권 158페지)

슬기로운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세상에 자랑할만한 우수한 문화유산들을 수많이 창조하였으며 그 과정에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마련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종이를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중앙관청으로서 조지서가 있었다. 1415년(태종 15년)에 《조지소》로 설치되였던것을 그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1466년(세조 12년)에 조지서로 고치였고 1882년(고종 19년)에 페지하였다.

조지서에는 그 관원으로서 제주(提調) 2명, 사지(司紙) 1명, 별제(別提) 4명을 두었으며 관청소속 구실아치로서 약간의 서원(書員), 고직(庫直), 사령(使令)을 두었었는데 1495-1505년사이에 사지를 없애고 별제 1명을 더 두었으며 1506년에 원래대로 복구하였다가 후에 제주 1명, 사지 1명, 별제 2명을 없애였으며 1765년에 다시 제주 1명을 더 두었다.

조지서에는 장공인으로서 지장(紙匠), 렴장(簾匠), 목장(木匠) 등이 있었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각종 서적출판이 활발해진것과 관련하여 종이수공업도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중앙에서 필요되는 종이생산보장을 바로 조지서에서 맡아보았다.

종이를 처음에는 지방의 특산물을 헌납하는 토공품의 일종으로 받았으나 이것만으로써는 정부의 수요를 총족시킬수 없었고 또 요구되는 규격과 질을 보장할수 없었으므로 1415년에 한성에 《조지소》를 설치하였으며 그 기능이 높아짐에 따라 1466년에 조지서로 승격시키였던것이다.

조지서의 기능은 표문지, 전문지, 자문지 등 각종 종이생산을 맡아보는것이였다.

당시 종이생산원료로서는 주로 닥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이 나무는 함경도를 제외하고 전국 각지에서 재배하였다.

닥나무외의 원료로써 참대잎, 솔잎, 짚, 버들가지 등도 리용하였다.

종이의 원료에 따라서 삼과 닥나무를 배합하여 만든 마저지, 벼짚으로 만든 고정지, 솔잎으로 만든 송엽지, 부들로 만든 표절지, 보리짚으로 만든 모절지, 삼대로 만든 마골지, 버들가지로 만든 류목지, 버들잎으로 만든 류엽지, 율무로 만든 의이지 등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었다.

보통 황지는 대잎과 뽕나무껍질을 섞어서 만들었고 백지는 뽕나무껍질로만 만들었다.

종이의 질적측면에서 보면 얇은 고급종이인 고정지가 있었고 질이 좋고 다듬이질을 잘한 경면지, 죽엽지가 있었으며 맑고 치밀한 자문지, 종이색이 눈같이 흰 설화지, 정교하고 질이 매우 치밀한 부채종이로 쓰인 선자지, 보관용문건에 쓰인 질기고 두터운 간장지, 기름에 절인 주유지, 여러가지 색물감을 들인 은은하고 구수한 맛이 도는 장식용종이인 색간지, 조선종이가운데서 가장 얇은 피지 등이 있었고 그 용도의 측면에서 보면 표문지(表文紙-자기 의견을 표시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을 적는데 쓰던 종이), 전문지(箋文紙-나라에 길한 일이나 흉한 일이 있을 때 신하가 임금에게 써올리던 사륙체로 된 글을 적는데 쓰던 종이), 자문지(咨文紙-봉건시기 관청들사이에 오고가던 공문작성에 쓰던 종이)가 있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조지서의 관할밑에 생산한 종이는 그 질이 대단히 훌륭하여 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봉건왕조시기 관리이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세종때 〈조지소〉를 설치하고 표문지, 전문지, 자문지와 인쇄물의 여러가지 색지들을 만드는것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그 품질이 한결같지 않았다.

고정지, 류엽지, 류목지, 의이지, 왜지가 있었는데 인쇄한 서적 역시 아주 훌륭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봉건관리이며 실학자인 리수광(1563-1628)은 1596년에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의 한 관리가 조선의 죽엽지 한장을 내놓으면서 이런 종이를 가져왔으면 얻자고 청했다는 사실을 들면서 당시 중국에서 조선의 경면지와 죽엽지(모두 질좋은 닥나무를 주원료로서 다듬질가공을 잘한 우수한 종이)를 매우 귀중히 여겼다고 전하고있다.

이 시기 여러가지 종이가 발전하였기때문에 1432년에 《자치통감》(150권) 600부를 인쇄하는데 30만권(한권이 20장)의 종이를 썼으며 1457년에 《대장경》을 50부 인쇄할 때에도 40만 6 200권의 종이를 소비하였다. 이것은 당시 종이제조사업이 얼마나 큰 규모로 진행되였는가 하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뚜렷한 실례로 된다.

조선종이는 외국에 많이 수출되였다.

실례로 1419년(세종원년)에는 순백후지 1만 8000장과 순백차후지 7 000장을 명나라에 수출하였고 1420년에는 후지 3만 5 000장을 수출하였다.

이것은 조선종이에 대한 대외적수요가 매우 높았다는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조선봉건왕조시기 조지서에서는 닥나무를 비롯한 우리 나라에 무진장한 종이자원에 의거하여, 우리의 기술에 의거하여 각이한 재질의 우수한 종이를 생산하였다.

종이구입으로부터 시작하여 종이생산은 근로인민대중의 지혜와 노력의 산물이였지만 생산된 종이는 봉건통치배들의 소유물로, 향유물로 되였다.

그러나 조지서에서 생산한 우수한 종이가 있어 조선봉건왕조시기 수많은 서적들이 출판간행되여 민족의 재보로 전해질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