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룡악산 법운암의 력사

 2021.9.7.

법운암은 평양시 만경대구역 룡봉동의 룡악산중턱에 자리잡고있다.

룡악산은 록음이 우거진 여름경치가 하도 좋아 예로부터 평양8경의 하나인 《룡산만취》(龍山晚翠-룡악산의 록음우거진 풍경)로 일러오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평양시중심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절은 대성산에 있는 광법사와 룡악산에 있는 법운암일것입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4권 49페지)

법운암은 비록 암자건물에 속하는 크지 않은 절이지만 현재 평양시 중심에서 제일 가까이에 있는 불교사원중의 하나이다.

법운암
그림. 법운암

법운암의 력사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더듬어볼수 있는것은 여러가지 평양지들, 《법운암불향전답단월기적비》, 조선민족유산보존사에 있는 유적대장의 자료들이다.

법운암의 이름이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난것은 《평양지》 계통의 책들인 《평양속지》와 《평양대지》이다.

《평양속지》의 불사조에는 《법운암은 부의 서쪽 30리되는 룡악산에 있다.》(法雲掩在府西三十里龍岳山)고 써있다.

《평양대지》에서도 《평양속지》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고있는데 법운암이 룡악산에 있다고만 했을뿐 그의 력사에 대해서는 전혀 밝히지 않았다.

법운암을 세운 년대에 대하여 간단하게 자료를 전해주고있는것은 《법운암불향전답단월기적비》이다.

이 기적비는 법운암에 안치한 부처들을 공양하는데 쓰라고 논밭을 희사한 사연을 적은 비이다.

* 이 기적비는 현재 실물이 없으며 조선민족유산보존사에 있는 유적대장에 비의 앞면을 찍은 사진이 있어서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알수 있을뿐이다.

그런데 비의 뒤면사진이 없어 비를 세운 년대와 관계자들의 이름을 알수 없다. 이 비는 방형받침돌우에 비머리돌이 없이 비몸웃면을 둥글게 가공하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약간 폭을 좁게 한 조선봉건왕조후기에 흔히 볼수 있는 비형식이다.

《법운암불향전답단월기적비》에서는 법운암이 《고구려 광개토왕 2년에 창건》(創建于高句麗 廣開土王二年)되고 《여러차례 중수한 내용은 여러 영명사중수비와 평양구지를 살펴보면 알수 있다.》(屢經重修考諸永明寺重修碑及平壤雀誌)고 되여있지만 여러 영명사중수비는 지금 전해지고있는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조선금석총람》2권(1919년판)에 1846년에 세웠다는 《영명사비》가 실려있는데 이 비문에는 당시 영명사를 중수한 내용이 있을뿐 법운암은 물론 영명사의 연혁조차 실려있지 않다.

그러므로 법운암의 력사는 많은 경우 유물자료를 통하여 밝혀내야 한다.

법운암을 고구려때에 지었다고 볼수 있는 근거는 유물자료로 확인되고있다. 법운암주변에서는 이전부터 고구려기와들이 많이 수집되였는데 격자무늬가 많다.

법운암주변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격자무늬는 7세기경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법운암은 고구려말까지 계속 존재하였다고 인정된다.

법운암주변에서는 고려돌탑과 고려돌등의 일부 부재들도 나왔다.

우선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탑의 일부 부재들이 여기저기서 수집되였다.

기단의 면돌이 나왔는데 모서리기둥과 사이기둥 하나를 돋혔다.

탑몸의 몸돌은 통돌로 된것인데 네모서리에는 모서리기둥을 돋혔다.

지붕돌의 부재는 처마받침이 2단으로 되였고 웃면에는 웃층탑몸을 받기 위한 1단의 고임이 있으며 처마선은 복판에서 모서리쪽으로 가면서 아래웃선이 다같이 가볍게 귀들림하였다.

발견된 부재들을 연구하여 보면 이 탑은 3층정도였을것이다.

기단은 현재 면돌부재의 크기가 같은 조건에서 원래 단층기단이였는지 2층기단이였는지 하는것에 대해서는 알수 없다.

화강석으로 된 탑부재들의 세부가공이 대단히 정교하여 부재들이 제대로 있었다면 대단히 아름다운 탑이였을것이다.

이 탑부재들에서 기단면돌의 사이기둥이 하나인것,지붕돌의 처마받침이 2단으로 되고 탑몸고임이 각을 지은 1단으로 된것,지붕돌의 처마선이 아래우가 같이 귀들림한것 등은 고려중기의 탑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 특징들이다. 따라서 이 탑의 제작년대를 고려중기로 볼수 있다.

또한 돌등의 기둥돌받침부재로 추정되는 돌이 나왔다.

이 석재는 6각으로 되고 매 면마다 2개의 복련을 새겼으며 복판에는 기둥돌을 세웠을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홈이 파져 있는데 화재를 입어 돌의 일부가 심하게 탔다.

6각돌등은 고려시기에 널리 쓰인 돌등형식이다.

범운암에서 발견된 돌탑부재와 돌등부재는 이 절간이 고려시기에도 운영되였다는 확실한 증거로 된다.

따라서 법운암은 고려시기에 돌탑과 돌등을 세우는것과 같은 중창공사를 진행하였고 적어도 12세기경에는 번성하였다고 보게 된다.

주체52(1963)년 8월에 작성한 조선민족유산보존사의 법운암자료에는 조선봉건왕조초엽에 룡악산뒤면(서쪽)에 큰 절을 지었는데 몇년이 지난후 장소가 그늘진 곳이라고 하여 다시 옮겨지은것이 지금의 법운암이라고 되여있다.

이 자료가 무엇에 기초하며 작성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당시에는 그렇게 볼수 있는 근거가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조선봉건왕조초에 룡악산서쪽에서 지금의 법운암자리에 절을 옮겨왔다면 당시까지 이곳에 절이 없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고려말에 어떠한 원인으로 법운암이 페지되였다고 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절간의 변천은 《법운암불향전답단월기적비》의 내용으로 알수 있다. 비문에는 무오년 여름에 남해법사가 이곳에 온 후 신녀(녀자신자)들이 법운암의 형세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나 논과 발을 기부하여 크게 시주하였다는것만 있고 중수공사와 관련한 내용은 없다.

비문의 무오년이 어느해인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비문에 《평양구지》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평양속지가 마지막으로 편찬된 1855년이전의 무오년, 《평양속지》가 처음 편찬된 이후의 무오년인 1738년 혹은 1798년이라고 보게 된다.

법운암본전의 룡마루마무리기와들에 새겨진 명문에 《순치9년 임진4월》(1652년)이라는 글이 있으므로 이때에도 보수공사를 하였다고 볼수 있다. 이때의 공사규모는 잘 알수 없지만 현존 건물이 조선봉건왕조중엽의 건축양식을 많이 띠고있는것으로 보아 중수공사를 하였다고 본다.

그밖에 법운암이라고 쓴 현판기에 《병자 여름에 쓰다》라 고 쓴 락관이 있는데 이 락관은 김리인(金履寅)이 썼으며 당시의 나이는 70살이였다.이 현판기도 혹시 법운암의 중수와 관련한것일수 있으나 이 병자년이 어느해인지 알수 없으며 김리인에 대한 인물자료도 찾아볼수 없다.

이상에서 볼수 있는바와 같이 법운암은 고구려시기 5세기에 건설되여 현재까지 계속 이어온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다.

해방후 법운암은 여러차례에 걸쳐 중수되였으며 주체56(1967)년과 주체63(1974)년에 크게 중수되였다.

특히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63(1974)년 4월 법운암을 원상대로 보수하여 인민들에게 보여줄데 대하여 주신 교시에 따라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건물들의 구조가 일부 변경되였다.

중수이전의 본전은 앞면 5간중에서 동쪽 3간은 퇴마루로 되여있었고 서쪽의 2간은 퇴마루가 없이 통채로 부엌이였으며 방안은 구들을 놓은 구조였다.

그후 부엌을 없애고 앞면 5간에 모두 퇴마루를 하였으며 구들을 없애고 본전안을 전부 불상을 안치한 례배공간으로 만들었다.

불단은 동쪽의 3개의 경간가운데서 가운데경간의 뒤쪽에 있고 그 좌우경간은 막았던것인데 중수하면서 가운데 3개경간에 불단을 설치하고 그우에 관음보살대신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안치하였다.

주체92(2003)년에는 불상을 개금(불상에 입힌 금박을 다시 칠하는것)하고 단청도 새로 하였고 주체96(2007)년에는 법운암둘레에 옛 모습대로 담장을 다시 쌓고 대문도 새로 설치하였다.

우리 나라 력사에서 수많은 불교절간들이 세워지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들도 적지 않지만 평양의 룡악산 법운암처럼 1 600여년전에 건설된 이후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절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법운암은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재능이 깃들어있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으로서 조선로동당의 옳바른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해 나라의 국보로 잘 보존관리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