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서예가 김생

 2022.9.19.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력사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과 전통도 잘 알아야 한다.》(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6권 123페지)

슬기로운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세상에 자랑할만한 우수한 창조물들을 수많이 창조하였으며 그 과정에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마련하였다.

남달리 총명하고 지혜로운 조선인민은 서예분야에서도 세계에 자랑할만한 유산을 남겨놓았다.

후기신라때의 김생(711-?)이 그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그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김생은 출신이 한미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그의 가계를 알지 못한다.어려서부터 글재주에 능하였으며 다른 재주는 배우지 않았다.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80살을 넘어서도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예서, 행서, 초서가 다 신비하여 학자들이 보배로 전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글씨체를 다 잘 썼으며 력대 명필들의 좋은 기법들을 받아들이면서 힘찬 박력을 가진 자기의 독자적인 필법을 개척하여 당대의 명필로 이름떨친것은 물론 력대 학자들과 서예가들도 그의 글씨를 본보기로 하여 글씨를 다듬어나갔다. 그는 예서, 행서, 초서 등 여러가지 글씨체에 모두 능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이전의 4대명필의 첫자리에 놓고높이 평가하였다. 10세기중엽에 그의 글씨를 모아 《집자비》를 만들어 세웠는데 이 사실에 대하여서는 《해동금석총목》에 밝혀져있다. 2 500여자의 비문으로 된 탑비이다.

《동국리상국집》에서는 고려이전의 4대명필을 들면서 김생을 첫 자리에 놓았고 《파한집》에서는 《계림사람 김생이 붓쓰기를 귀신같이 하였다.》고 평가하였으며 《용재총화》에서는 《김생은 재능있는 서예가로서 아무리 가는 글씨라도 다 정교하게 썼다.》고 그의 높은 서예기능을 평가하였다.

그의 글씨는 조선에서뿐 아니라 이웃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동사강목》(제5권 상)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송나라 숭녕년간(1102-1106)에 학사 홍관(洪瓘)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김생의 행서와 초서를 보였더니 송나라의 한림대조 양구, 리혁 등 두 사람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오늘 뜻밖에 왕우군(王右軍; 중국 진나라때의 서예가 왕희지를 이르는 말)의 글씨를 보게 되였구나.〉고 하니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신라의 김생이 쓴것이요.〉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고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왕희지)을 제외하고 이와 같은 묘필이 또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한편 원나라때의 이름난 서예가이며 화가였던 학사 조맹부는 경주 금오산기슭에 있는 창림사(昌林寺)라는 옛 절간에 남아있던 비문에 발문을 쓰기를 《이것은 신라의 중 김생이 쓴 글자이다. 서체가 대단히 심오하였으며 곡진하고 법도가 있어서 비록 당나라의 이름난 조각가라도 이에 지나치지는 못할것이다.》라고 하였다.

보는바와 같이 조선에서뿐 아니라 이웃 나라에서까지 칭찬이 자자하였다. 중국에서는 김생을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칭찬하였다.

그의 필적으로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 등이 있다.

김생은 우리 나라 중세서예사를 빛나게 장식한 손꼽히는 명필, 서예가였으며 그가 남긴 필적은 귀중한 민족유산으로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