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박사 부교수 장현식
2020.8.14.
후대교육사업을 나라의 운명과 혁명의 장래와 관련되는 근본문제의 하나로 여기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교육조건을 보장하기 위한 사업에 언제나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교육사업에 언제나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시고 후대들을 키우는데 필요한것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고 다 돌려주시였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3권 407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교육조건보장사업에 언제나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시고 항일무장투쟁시기에는 혈전의 불비속에서도 근거지에 아동단학교를 세우고 교구비품과 학용품을 보장해주시였으며 해방직후에는 연필문제를 인민정권의 첫 회의의정에 넣어 해결해주시였다.
교육조건보장사업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선차적인 관심은 모든것이 파괴되였던 전후복구건설시기에도 변함이 없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후복구건설의 첫시기 해야 할 수많은 일들가운데서도 학생들의 학습장생산문제에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시고 이 사업을 현명하게 령도하시였다.
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두달밖에 안되는 주체42(1953)년 9월 27일 신의주팔프공장(당시)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종이공장부터 먼저 복구하고 학습장과 교과서부터 만들어줄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길을 오신 피로를 잠시라도 푸실것을 바라는 일군들에게 어서 공장을 돌아보자고 하시면서 팔프직장쪽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팔프직장을 거쳐 제지직장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초지기앞에서 걸음을 멈추시고 벌써 종이가 나온다고 무척 기뻐하시면서 일군들에게 수고하였다고, 이렇게 기계가 돌아가고 종이가 나오는것을 보니 아주 기쁘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종이로 아이들의 학습장부터 만들어주자고 하시며 공장의 당위원장에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가고 물으시였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둘이라는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위원장동무의 아이가 어찌 둘뿐이겠는가고 하시면서 동무들은 온 나라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여야 하며 아버지된 심정으로 아이들의 학용품을 걱정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면서 나라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종이공장부터 먼저 복구하고 학습장과 교과서를 만들어 어린이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이를 자르는 로동자들의 작업모습을 보시고서는 종이를 자르는 공정을 기계화하며 표백공정을 완성하여 새하얀 학습장을 생산할데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다음 생산공정인 제약실에 들어가려고 하시였다. 이때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앞을 막아나서며 들어가시지 말것을 간청하였다.
일군들로부터 전쟁의 피해를 완전히 가시지 못하여 파괴된 로에서 류황냄새와 아류산가스냄새가 새여나오고있기때문이라는 사정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동자들이 일하는데 왜 나라고 못들어가겠는가고 하시며 작업장을 구체적으로 돌아보시고 가스가 나오지 못하게 밀페장치를 하고 환기장치도 설치하여 로동자들의 건강에 해롭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다녀가신 후 공장은 두대의 초지기를 단 두달동안에 복구하고 이듬해부터는 종이생산을 정상화하였으며 기술혁신으로 초지기의 회전속도를 단꺼번에 2배로 높여 종이생산을 배로 늘이였지만 량에만 치우치면서 학용품의 질은 높이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때인 주체45(1956)년 4월 4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를 며칠 앞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또다시 공장을 찾으시였다.
제지직장에 들리시여 종이생산정형을 료해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방금 잘라낸 종이를 한장 드시고 손수 만져보시면서 종이의 질을 가늠해보시였다. 종이의 앞뒤면을 몇번이고 다시금 쓰다듬어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종이를 이렇게밖에 만들어주지 못하겠는가고 하시며 종이의 질을 결정적으로 높여 학생들에게 량면지로 된 학습장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량면이 다같이 반드럽게 되여있는 종이로 만든 학습장을 받아안고 좋아할 학생들을 그려보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담하게 해보라는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생산현장을 다 돌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중앙위원회는 신의주팔프공장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다고 하시면서 생산면적을 합리적으로 리용하여 초지기를 더 설치하고 종이를 많이 생산하며 그 질을 결정적으로 높이고 가지수를 늘여야 한다고 다시금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주체47(1958)년 6월 23일 또다시 공장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학습장을 매고있는 일터에 들리시여 책을 잘 맸다고 하시고 계선실에 들리시여서는 인쇄잉크냄새가 풍기는 종이를 드시고 아이들의 수준과 기호에 맞게 잘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의 이름으로 공장의 종업원들에게 감사를 주시고 후대들을 위해 큰일을 하는 동무들이라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장을 떠나시려다말고 무엇인가 못다하신 말씀이 있으신듯 일군들앞으로 되돌아오시여 이제부터 할 일이 많으니 성과에 자만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늘어나는 학생들의 종이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생산면적을 더 잘 리용하여 초지기도 더 들여놓고 생산능력을 부단히 늘이는것과 함께 생산을 정상화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그후 공장은 생산능력을 높이고 생산을 정상화하였지만 점차 비할바없이 높아진 생산능력에 맞게 종이생산원료를 미처 따라세우지 못하여 기대들에 만부하를 걸지 못하게 되였다. 이러한 실태를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55(1966)년 8월 27일 공장의 원료공급체계를 정연하게 세우고 종이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할수 있는 대책을 세워주시기 위하여 수많은 일들을 뒤로 미루시고 벼고장인 평안북도 룡천군 장산리와 신암리를 찾으시였다.
잊지 못할 장소인 장산리민주선전실을 또다시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농민들과 허물없이 무릎을 마주하시고 벼짚보장사업의 중요성과 실태를 알려주시면서 전시식량생산에서 앞장섰던 동무들이 나라의 종이원료를 보장하는데서도 모범이 되라고 고무해주시였다.
농민들속에 들어가시여 실태를 료해하시고 조직정치사업을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선로동당 평안북도위원회 전원회의에 참가하시여 일군들에게 종이원료를 해결하기 위한 결정적인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벌방에서는 벼짚을, 산간군에서는 강냉이짚을 수매하여 제때에 공장에 보내주는 체계를 철저히 세워 종이생산을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하라고 그 방도까지 일일이 가르쳐주시였으며 종이원료를 제때에 실어오도록 십여대의 화물자동차를 공장에 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와 따뜻한 보살피심속에 공장은 원료부족을 모르고 인민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종이들과 학습장을 질적으로 생산하게 되였으며 학생들은 질좋은 학습장을 쓰면서 조국의 부강번영에 이바지할 지식을 튼튼히 다지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