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TV문학은 TV방송의 발생과 더불어 생겨난것만큼 TV방송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TV방송의 개시는 우리 나라에서 TV문예물을 창작할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TV프로를 보다 흥미있게 만들어보려는 방송부문전문가들의 소박한 시도는 TV문예물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싹으로 되였다.
《문학부문에서는 이미 이룩한 성과와 경험에 기초하여 발전하는 현실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여야 한다.
특히 텔레비죤문학을 여러 형태에 걸쳐 새로 개척하는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
TV문예물로 첫발을 뗀 TV문학의 발생발전은 새로운 문학형태로서의 체모와 형식을 부단히 변화발전시키면서 발전한 과정이였다.
TV문예물이 발생하던 당시의 TV방송기술수준은 아직 TV문학작품을 창작할수 있을만 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당시 TV방송은 아직 TV록화기술이 개발되기 전이였으므로 TV방영물을 다양하고 흥미있게 만들수가 없었다. 다른 편집물은 두말할것도 없고 영화를 방영하는 경우에도 영사막으로 상영되는 영화를 TV촬영기로 촬영하면서 중계하였고 무대공연인 경우에도 한번 중계한 공연을 다시 방영하려면 영화촬영기로 찍어서 수록했다가 영사기로 다시 돌려 방영해야 하는 형편이였다.
따라서 초기 TV방송은 새 소식을 전하는 보도수단으로만 주로 리용되였으며 문예물을 방영한다고 해도 무대에서 공연하는 작품들을 실황중계하거나 영화를 방영하는 등 다른 문예물들을 되받아넘기는데 불과하였다. 다른 나라들의 실태도 이 시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남의 경험같은것을 얻을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 창작가들은 TV극을 전문으로 창작하는 단위도 없는 형편이였지만 우리 나라 사회주의조국의 현실을 경희극적인 양상으로 보여주는 《유쾌한 통신원》같은 작품들을 《TV련속극》이라는 명칭을 달아 방영하였다.
TV방송이 처음 개시되던 시기는 록화기술이 개발되기 전이였으므로 이 TV련속극도 촬영장에 설치된 자그마한 무대에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를 바닥에 고정된 육중한 구식 TV촬영기 2~3대로 촬영하는 즉시로 TV방송으로 전송하군 하였다.
그러다나니 배우가 연기도중에 실수를 해도 그냥 TV화면으로 방영되군 하였다.
결국 이 시기 TV극은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극상해야 5~10분정도의 토막극과 같은것이였다.
어찌 보면 영화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대극같기도 한 그러한 작품들은 사실상 구성조직이나 화면편집이 어설프기 그지없는 작품들이였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62(1973)년 7월 22일 우리 TV문예물의 창작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TV문예물을 영화나 연극의 흉내를 내지 말고 TV방송문예물로서의 고유한 특성을 적극 살려나가야 한다고 하신 이날의
TV방송의 특성에 맞는 문예물이란 TV수상기로 방영되는 문예물이라는 독특한 시청방식의 특성을 체현한 문예물로서 어디까지나 대사가 재미있어야 한다는것과 장소가 일정하게 고착되여야 한다는것 그리고 화면문학의 특성에 맞게 배우의 형상과 촬영, 기교, 음악편집 등 영화적인 기본형상수단들을 종합적으로 리용할 때에만 자기 고유의 체모를 갖출수 있게 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TV문예물이 철저히 TV방송의 특성에 맞게 창작되여야 한다는
이날
초기 TV소설은 소리방송에서의 소설랑독과 같았는데 다른점이 있었다면 소설을 읽는 랑독자의 모습을 시청자들이 직접 보는것이였다. 이러한 형식도 일정하게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였다. 랑독자의 모습을 화면으로 보면서 소설을 듣는것이 새맛을 느끼게 하였던것이다.
TV소설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TV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의하여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였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개발된 VIDEO(화면록화)기술은 TV방송과 TV문예물창작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는데 큰 도움으로 되였다.
배우들의 연기형상을 시간적제한을 받음이 없이 계속 반복하여 촬영수록하면서 질좋은 화면자료들을 얻어내여 보관할수 있으며 한번 촬영해두면 아무때건 리용할수 있고 마음먹은대로 임의의 자료를 편집할수 있는 VIDEO기술이 개발됨으로써 TV촬영기로 TV문학을 문예물의 체모를 갖춘 작품으로 만들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주게 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창작가들은 TV소설에서 처음부터 마감까지 랑독자의 랑독만으로 되여있던 당시의 따분한 방식대신에 소설의 극적대목 즉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배우들의 실지 역형상으로 보여주는데 성공할수 있었다.
주체70(1981)년 7월에 나온 TV소설 《그를 알기까지》가 바로 그 실례이다.
이런 형식의 소설을 이전시기 랑독만 하던 소설과 구별하여 화면배합소설이라고 하였다. 광물지하자원탐사대원의 애국적소행을 주제로 한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이 형식이 바로 오늘날 말하는 TV소설의 원형이였다.
TV소설은 극적인 묘사부분과 소설랑독대목이 서로 배합되여있다.
TV소설은 원작의 기본묘사부분들에 한하여 랑독으로 살리면서도 극적인 장면들에서 배우들이 출연하여 립체감이 나게 형상한 새로운 형식이였다.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TV소설의 생리를 가진것으로 하여 작품은 우리 나라 TV소설의 첫 작품으로 되였다.
이 작품의 창작을 계기로 우리의 TV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VIDEO기술이 개발됨으로써 TV소설이라는 TV문학형태의 출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초기에 발생했다가 사라졌던 TV극이 다시 출현하여 활발히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화면배합소설형식의 TV소설이 처음 등장하던 1980년대초에 TV극의 사상예술적체모를 비교적 갖춘 TV극 《잊을수 없는 청년》(1983년 원인걸), 《진심》(1984년 원인걸)이 창작되였으며 1980년대 중엽에는 2부작의 TV극 《우리 아버지들은 병사였다》(1985년 윤광연), 《정든 고향》(1985년 원인걸), 《우리 집 주소》(1985년 오정호), 《여기는 내 고향》(1987년 김국성) 등 여러 편의 TV극작품들이 창작되였다.
새롭게 시작된 TV극창작은 어디까지나 TV소설창작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이 시기 창작가들은 TV극을 작품 전과정이 극적인 묘사방식으로만 전개된 문학으로 보았으며 이것을 배우의 랑독과 극적묘사방식이 유기적으로 배합된 TV소설과의 차이로 보았다.
그러므로 TV극들인 《잊을수 없는 청년》, 《우리 아버지들은 병사였다》 등은 소설랑독과 같은 묘사가 전혀 없는 극작품이였다.
발생초기의 TV극들은 모두 단부작이 아니면 기껏해야 2부작정도의 짧은 형식이였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그중에서도 중요하게는 초기 TV극을 무대우에서 창조했던것으로 하여 무대극적인 특성을 살리는것을 원칙으로 내세웠던 사정과 관련된다. 이로부터 무대극소품처럼 하나의 기발한 극적착상을 전제로 하여 생활의 극적인 단면을 재치있게 보여주는것을 TV극문학의 형상생리처럼 여기게 되였던것이다.
이 시기에 창작되였던 TV극문학 《별이》(1984년)는 전후시기에 별이라는 애어린 소녀에게 전선에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이라는 어느 하루의 정황을 제시하고 2명의 《아버지》들의 출현을 극적으로 형상함으로써 전사한 전우의 딸을 맡아키우려고 전선에서 곧바로 찾아오는 인민군병사들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이 시기에 창작된 TV극들은 생활의 극적인 단면을 포착하고 그것을 형상하는 수법을 기본극작술로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TV소설과 TV극이라는 TV형태가 출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TV예술영화라는 TV문학형식이 또 출현하였다.
이렇게 되여 우리 나라에서는 TV문학이 발생하면서부터 TV소설, TV극, TV예술영화라는 세개의 형태가 동시에 발생하였으며 이 세개 형태를 통칭하여 TV문학으로 불렀다.
오늘날에 와서 이 세 형태중에서 TV극을 기본으로 발전하고있는것을 보면 발생당시에 TV소설이 앞서나갔다는 사실은 우리 나라 TV문학의 발생과정의 특성으로 봐야 할것이다.
물론 TV극이 제일먼저 발생하였지만 TV문학의 특성을 처음부터 잘 살리면서 발전한것은 TV소설이였다. 그것은 TV문학형태가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인정시킨것은 TV소설이였기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TV문학발생당시에는 TV소설이 TV문학형태들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형태로 되였다.
이 시기에 창작된 TV문학의 대부분이 TV소설이였다는것은 그것을 말하여준다.
TV소설은
TV련속소설 《석개울의 새봄》의 창작으로 하여 우리 나라 TV문학은 예술영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자적인 예술형태로서의 모든 체모를 완벽하게 갖추게 되였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