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형남
2019.3.2.
한평생 오로지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로고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대동강반에 일떠선 옥류교에도 뜨겁게 깃들어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는 인민에 대한 사랑을 가장 숭고한 높이에서 체현하신 우리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8권 98페지)
주체47(1958)년 3월 어느날 건설부문의 한 책임일군을 당중앙위원회청사로 부르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더 미룰수 없는 문제가 있어서 불렀다고 말씀하시면서 평양시건설계획에 제2대동교(당시)를 언제부터 건설하기로 되여있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은 어버이수령님께 자금사정으로 대동강에 새로 놓게 되여있는 다리는 5개년계획기간에 시작하지 못하고 주체50(1961)년부터 착수하기로 되여있다고 말씀드리였다.
그날 아침 위대한 수령님께서 동평양쪽을 돌아보시고 대동교(당시)를 넘어오시는데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이 대동교가 미여지게 줄을 지어 다리를 건느고있었다.
그것은 겨우내 두텁게 얼었던 대동강이 풀리기 시작하여 얼음을 타고 건너다니던 사람들이 얼음판에 들어서지 못하고 나루터로 모여들었으나 풀리는 얼음때문에 아직은 나루배도 다닐수 없게 되여 그런데로부터 대동교웃쪽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곧추 가면 잠간 갈수 있는 거리를 멀리 에돌아 대동교를 통하여 출근하고있었던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에게 아무래도 우리가 힘겨웁지만 제2대동교건설을 5개년계획이 끝난 다음에 시작할것이 아니라 5개년계획기간안에 끝내자고, 혁명도 건설도 인민을 위해서 하는것이라고 확신에 넘쳐 교시하시였다.
그때로부터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군을 부르시여 대동강 선창에 있는 배를 가리키시며 저 배를 타고 우리 함께 시내를 한번 보자고 하시였다.
어느덧 배가 오늘의 옥류교위치에 이르자 모란봉과 릉라도를 이윽히 바라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두팔을 벌리시여 강안의 량쪽을 가리키시면서 여기가 어떤가고, 대동교보다 훌륭한 새 다리를 여기에다 놓자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다리의 위치를 현지에서 잡아주시고 주체49(1960)년 5월 30일 평양시안의 여러 건설장을 현지지도하신데 이어 《제2대동교》(당시)건설장을 찾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건설장을 돌아보시고 다리의 건설속도가 비상히 빠른데 대하여 치하하시고나서 이 다리는 우리 시대의 훌륭한 기념물이니 다리를 놓을 때 잘 놓자고 하시며 건설자들의 의견을 허물없이 들어주시였다.
그때 그 일군은 앞으로 남은 공사에 대하여 보고드리면서 다리이름을 《제2대동교》라고 부르지 말고 다르게 짓자는 의견이 전국각지의 인민들로부터 제기되였다고 말씀올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다리가 전국의 관심사로 되고있는것은 좋은 일이라고 하시며 제기되고있는 의견들을 자세히 이야기하라고 하시였다.
사실 이 다리건설에 대한 인민들의 관심은 매우 높았다. 수도시민들뿐아니라 전국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로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 다리건설을 지원하여나섰는데 기초공사가 끝나고 교각이 일떠서기 시작하면서 다리의 이름에 대한 의견도 많이 제기되였다.
전국각지의 인민들은 편지로 또는 전화로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천리마시대에 새로 건설하는 현대적인 다리인데 어떻게 해방전에 건설한 《대동교》에 비겨 《제2대동교》라고 하겠는가고 하면서 다리이름을 새로 짓자는것을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천리마시대에 건설했다고 하여 《천리마교》 또는 전진하는 시대에 건설했다고 하여 《전진교》 또는 《약진교》, 다리건설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고 하여 《혁신교》, 남쪽으로 나가는 다리라고 하여 《남진교》, 다리형성이 무지개 같다고 하여 《무지개다리》로 부르자는 등 참으로 많은 의견들을 제기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의견들을 다 들으시고 참 좋은 의견들이 많이 제기되였다고, 이것은 이 다리에 대한 인민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가를 잘 보여준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혁명도 건설도 인민을 위해서 한다고, 그러니 인민들은 나라에서 하는 일을 모두 자기 일로 여기는것이라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그러시더니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다시 외워보시다가 이름들은 조금 딱딱한 느낌을 준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다리에 이름을 하나 붙여도 인민들이 부르기 좋아하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릉라도와 좌우의 강변을 바라보시면서 아마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저 릉라도 여울물이 구슬같이 반짝이면서 흐른다고 하여 옥류라고 하고 그래서 그 옥류와 부딪치는 저 병풍같은 돌벽을 옥류병이라고 불렀을런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마침 옥류병근방에서 일하고있는 한 석공로인을 보시고 저 로인에게 이고장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보자고 하시였다.
뜻밖에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석공로인은 감격을 억제하지 못하면서 방금전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말씀하신것과 꼭같이 릉라도앞의 물결이 구슬같다고 하여 옥류라 하고 그 옥류가 부딪치는 이곳을 구슬옥, 흐를류, 병풍병자를 써서 옥류병이라고 한다고 정중히 말씀올리였다.
로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멀리 모란봉과 청류벽이며 릉라도와 반월도를 바라보시고 흐르는 대동강물결에 한동안 눈길을 보내시다가 참말로 이곳을 흐르는 대동강물은 글자 그대로 옥류입니다, 그러면 예로부터 인민들이 즐겨부르는 옥류라는 이름을 따서 옥류를 건느는 이 다리를 《옥류교》라고 하자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인민의 의사와 념원을 담아 대동강에 새로 놓는 다리의 이름을 친히 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다리의 이름판도 친필로 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히 현지에 나오시여 다리의 이름을 지어주신 이후 옥류교건설자들과 지원자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으며 다리건설이 완공단계에 들어서면서 이제는 다리이름판의 글씨를 어떻게 쓸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게 되였다.
이때 옥류교건설자들속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이 다리의 건설을 발기하시고 그 터전을 잡아주셨으며 다리의 건설과정도 지도해주시고 다리이름도 친히 지어주셨으니 다리이름판도 응당 수령님의 친필을 새겨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야 한다는 한결같은 의견이 제기되였다.
이것은 건설자들뿐아니라 전체 우리 인민의 한결같은 념원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일군들은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 이 념원을 풀어주실것을 말씀올리였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씌우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굳이 사양하시였다.
그러던 주체50(1960)년 7월 하순 수도를 멀리 떠나시여 어느 지방을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시여 옥류교의 개통준비가 어떻게 되였는가고 물으시였다.
일군이 다른것은 다 되였는데 아직 다리이름판을 새기지 못했다고 말씀드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왜 아직 새기지 못했는가고 하시며 가볍게 나무라시는것이였다.
일군으로부터 전체 인민이 어버이수령님께서 친필해주실것을 바라기때문에 그 의사를 꺾기가 어렵다고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참동안 말씀이 없으시더니 인민들이 정 그렇게 희망한다면 붓과 먹을 보내라고 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옥류교》라고 쓰신 활달한 필치의 더없이 귀중한 친필원고를 보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필원고 여섯장가운데서 마음에 드는것을 골라가지고 글 잘쓰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꼭 가필을 시키고 그 결과를 자신께 알려달라고 하시였다.
그리하여 그 일군이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대로 붓글씨에 조예가 깊다는 두 로인을 청하여 어버이수령님의 필적이라는것을 밝히지 않고 가필을 부탁하였지만 그들은 자기들은 이런 옥필을 아직 보지 못했다고, 이 글은 대인이 쓴 글인데 제가 어찌 이런 글에 감히 붓을 댈수 있겠는가고 하면서 글을 정중히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대로 획이 되고 글발이 된 이 불멸의 친필이 다리에 새겨지게 되였다.
이처럼 옥류교는 그 설계로부터 시공, 다리의 이름과 다리이름판의 글씨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손길에 의하여 완성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