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어버이수령님과 고구려의 력사 (2)

 2016.11.28.

강대국으로서의 고구려의 주권적면모를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불멸의 애국업적

지난날 대국주의자들과 반동사가들, 사대주의사가들은 고구려국가의 주권적면모를 완전히 외곡하고 고구려국가의 지위를 왜소화하는 날조행위를 감행하였다.

고구려국가의 주권적면모에 관한 문제는 고구려가 당시 당당하게 자주권을 행사한 국가였는가 아니면 주변나라에 종속되여 그 어떤 자주권도 행사하지 못한 국가였는가에 대한 문제로서 중세시기 외세와의 관계에서의 우리 민족의 지위를 보여주는 력사상의 중요한 정치적문제이다.

대국주의자들과 어용반동사가들은 고구려국가가 자주권을 행사할수 없는 봉건중국의 지방정권, 예속정권이였다고 고구려국가의 면모를 날조하였으며 저들의 력사를 취급한 각종 력사관계도서들에서 그것을 더욱 기정사실화하여 서술하는 행위들을 감행하였다.

자기 민족에 대한 애국심이나 외세의 력사날조행위에 대한 반항심이 꼬물만치도 없었던 극도의 사대주의자 김부식은 고구려국가의 주권적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력사적사실들을 전면 삭제해버리고 고구려가 봉건중국에 대하여 줄곧 사대하여온 국가였다고 사실을 날조하여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서술하는 반민족적행위를 감행하였다.

고구려력사외곡책동에 이골이 난 반동들의 극도의 대국주의적, 사대주의적관점과 립장으로 하여 중세동방의 강국으로 존엄높았으며 조선민족의 위용을 만천하에 과시하면서 중세동방력사발전의 중심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고구려는 강력한 주권국가였던 자기의 진면모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였다.

민족의 위대한 애국자, 걸출한 력사가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에서 자기모습을 잃어버렸던 고구려국가의 주권적면모를 찾아주시는 실로 커다란 력사학적업적을 쌓아올리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 력사를 돌이켜보면 국력이 제일 강대하였던 시기는 고구려시기였다고, 고구려는 광활한 령토와 주민을 차지한 동방의 강성대국이였다는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가 제일 강하였던 시기는 고구려시기입니다. 고구려가 강성대국으로 이름을 떨칠수 있은것은 모든 사람이 말을 탈줄 알고 활을 쏠줄 알았기때문입니다.》 (김일성전집》 제46권 384페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82년(1993)년 4월 25일 혁명연극 《승리의 기치따라》를 보시고 일군들과 하신 담화에서 고구려가 강대하였기때문에 당시 중국사람들이 고구려를 두려워하였다고, 중국최초의 황제였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것도 그와 관련되여있었다고 교시하시고 주체56(1967)년 3월에 소집하신 도, 시, 군 및 공장당책임비서협의회에서는 고구려때에 외래침략자들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였으며 혹시 쳐들어왔다가는 다 쫓겨가고말았다고, 그리하여 고구려때 우리 나라는 강대한 나라로 이름을 떨쳤다고 가르쳐주시였고 주체60(1971)년 5월 7일 재일조선인대표단을 접견해주시고 그들과 담화를 하시면서는 고구려가 강성대국으로 위력을 떨칠수 있은것은 모든 사람들이 말을 탈줄 알고 활을 쏠줄 알았으며 용감성을 키웠기때문이라고 가르쳐주시였으며 주체32년(1943) 9월 15일 조선인민혁명군 정치간부 및 정치교원들앞에서 하신 연설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에서 미천한 온달이 사냥경기에서 우승하고 등용되여 조국방위에서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잘 말해주고있는바와 같이 고구려에서는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도 무술에 능하고 지혜와 용맹성이 있는가를 중요하게 보았다고 교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은 고구려국가가 중세동방에서 그 어느 나라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강력한 주권국가로서 최강국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밝혀준 과학적이며 강령적인 지침이였다.

국가의 주권적면모는 그 강대성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된다.

고구려는 오늘날의 동북아시아의 광활한 령역을 가지고 수백만의 외래침략세력이 달려들어도 모조리 짓부셔버리고 조선민족의 위용을 세상만방에 힘있게 떨치였다.

고구려가 존재하는 천년기간 주변의 한, 위, 수, 당을 비롯하여 봉건중국의 나라들은 수십, 수백만으로 무려 10여차에 걸쳐 대전쟁을 일으켰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612년 고구려―수전쟁 때만 놓고 보더라도 수양제는 300만의 대적으로 고구려에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에 끄떡하지 않고 과감히 짓부셔버리고 조선민족의 슬기와 위용을 만천하에 높이 떨치였다.

고구려국가가 중세동방의 강대국으로 그 위용이 높았기때문에 주변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주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봉건중국의 위나라가 고구려를 강성하는 나라이며 자기 나라와 가까운 나라라고 일컬으면서 고구려국가의 사신을 다른 나라들의 사신보다 웃자리에 올려세우고 높은 대우를 하기까지 한 력사적사실, 봉건중국의 국가들이 자국을 황제국가라고 자칭하면서 주변의 종족과 나라들에 대하여 사대할것을 강요하면서도 고구려에 대하여서만은 그 강대성에 눌리워 어쩌지 못하였으며 스스로 고구려의 군주를 황제로 칭하였던 사실들, 고구려국가의 군주들이 년호를 쓴 사실들은 당시에 자주권을 당당히 행사하고있던 고구려국가의 주권적면모를 뚜렷이 실증해주는것이다.

고구려국가가 주권국가였는가 아닌가 하는것은 나라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처리 특히 국가제도를 실시하는데서 자기의 주견과 주장을 확고히 견지한데서 표현되였다.

황제국가와 제후국가, 대왕국가와 소왕국가라는 기준으로 당시 주권국가인가 예속국가인가 하는것이 갈라지던 중세시기 황제국가에 예속된 제후국이 황제의 승인이 없이 황제국가가 실시하는 제도와는 다른 국가제도와 국가적조치를 취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것이였다.

고구려국가는 국가통치기구설치로부터 군사제도, 인재등용제도를 비롯한 국가의 모든 제도들을 자기의 독자적인 결심과 의지에 따라 수립실시하여왔다. 때문에 이러한 국가제도들은 봉건중국의것과는 다른것이였으며 오히려 봉건중국의 국가통치기구수립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것이다.

고구려국가에서는 왕실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으로서 《내평》과 국가의 일반행정사무를 맡아보는 최고기관으로서 《외평》을 설치운영하였는데 고구려국가보다 70여년후에 수립된 봉건중국의 한나라에서 앞서 존재한 진나라에서는 설치하지 않았던 궁실사무를 맡아보는 기관으로서 《중조》와 일반행정을 맡아보는 최고기관으로서 《외조》를 새롭게 설치한것은 고구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밖에 달리 볼수 없는것이다.

국왕밑에 최고의 관리직으로서 막리지라는 부대왕적관리직을 설치하여 국가의 군사와 행정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귀족민주주의합의기관인 제가평의회를 설치운영한것, 상무정신위주의 인재선발등용제도를 실시한것,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들에게 넓은 면적의 지역을 식읍으로 떼여주던 제도를 실시한것을 비롯하여 고구려가 실시한 모든 국가제도들은 봉건중국의 국가들에서 실시하고있던 제도들과는 전혀 다른 고구려고유의 제도들로서 고구려국가가 당당한 주권국가였다는것을 보여주는 뚜렷한 실례로 된다.

실로 어버이수령님의 세심하고도 탁월한 지도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고구려는 자기의 주권적면모를 되찾게 되였으며 중세동방의 강대국으로서의 고구려의 면모는 우리 인민은 물론 전세계인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