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지난날의 력사적인물들을 계급적립장에 서서 그들이 민족사발전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하는것을 기준으로 하여 정확히 평가하여야 합니다.》 (
우리 민족의 존엄과 자주권을 지켜 용감하게 싸운 자랑찬 반침략투쟁사의 갈피에는 13도창의대장으로 이름떨친 반일의병장 리린영도 있다.
경기도 려주의 유생가정에서 출생한 리린영(1867~1909)은 일찌기 의병투쟁에 나서서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로 말하면 1905년 11월 17일 《을사5조약》의 강압날조로 우리 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가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을 날조로 내정권마저 빼앗고 침략책동에 미쳐날뛰고있던 때였다.
일제의 조선침략책동으로 민족적위기가 전례없이 심각화되자 각지에서 활동하던 반일의병부대들이 반일투쟁을 더욱 힘있게 전개해나갔다.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반일의병장들은 《호소한다》, 《정미격문》, 《미국에서 사는 동포들에게 호소한다》, 《허위의 격문》, 《각도 창의소에 통고한다》, 《여러 부대에 통고한다》, 《두 간도에 거류하는 인사들에게》 등의 격문을 발표하여 일제침략자들과 친일주구들을 격멸하는 싸움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반일의병장들의 열렬한 호소에 호응하여 1907년 8월이후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각지에서 봉건유생들과 군인, 농민, 포수 등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망라한 반일의병대가 수많이 조직됨으로써 반일의병운동을 확대발전시켜나갈수 있는 력량이 마련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반일의병장 리린영도 강원도 원주에서 각지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모집사업을 적극 추진시켜 전국의 수많은 의병들을 한 대오에 련합시키였다.
당시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인 허위(1885-1907년, 호 왕산, 선산사람), 리은찬(1878-1909년, 원주사람) 등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리린영을 찾아가 자기들을 이끌어줄것을 제기하였다.
의병장들이 리린영을 찾아갔을 때 그는 림종직전에 이른
전국의 반일의병장들은 리린영을 13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일제가 조작한 통감부가 있는 한성을 공격할것을 계획하였다. 그들은 한성에 들어가 통감부를 격파하고 일제가 강압날조한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을 취소시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리린영은 원주에 가서 한성공격준비를 다그쳤다. 그는 전투력이 있는 의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보내여 수많은 사람들을 대오에 받아들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기려수필》에는 《격문을 각 도에 보내니 이에 고무되여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드는자가 밤낮 끊기지 않았다.》고 기록하고있다.
리린영은 또한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량식과 친일주구들에게 빼앗은 곡식으로 필요되는 군량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를 의병장들의 집결장소로 확정하고 각지의 의병들이 한성과 가깝고 교통도 편리한 경기도 양주의 왕방산에 집결하도록 조직사업을 하였다.
전국의 의병들이 앞을 다투어 왕방산에 모여들었는데 그 수는 무려 8 000명에 달하였다. 얼마후에는 허위, 리강년의 부대까지 합세하여 창의군의 력량은 8 000명으로부터 1만명으로 불어났다. 소총으로 무장한 3 000명의 구한국군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리린영은 허위, 리은찬 등 의병장들과 함께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리린영은 13도창의대장으로, 리은찬은 중군, 허위는 군사장으로 임명되여 작전계획을 세울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관동창의대장으로는 민긍호, 호서창의대장은 리강년, 령남창의대장은 박정빈, 경기 및 황대창의대장은 권의희, 관서창의대장은 방인관, 관북창의대장은 정봉준이 임명되였다.
지역별에 따라 반일의병대오가 재편성됨으로써 반일의병대는 자연발생적인 무질서가 일정하게 극복되고 전투력이 종전보다 한층 강화되게 되였다.
리린영은 대오편성을 끝낸데 이어 한성공격을 서둘렀으며 그 선두에 군사장 허위를 내세웠다.
양주지방에 집결한 리린영의 의병대가 한성공격을 계획하고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1907년 12월초에 동대문밖에 속사포 등 대포까지 설치해놓고 방어태세를 갖추고있었다.
적들의 발악적인 책동속에서도 허위는 초기의 계획대로 1908년 1월 하순 300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당도하여 주력부대의 진격을 기다렸다.
리린영은 의병들의 고조된 투쟁기세에 편승할 대신 고향에서
리린영의 귀향은 선발대로 나섰던 허위의 패보와 함께 의병의 사기를 저락시키고 부대를 와해에로 몰아넣는 비참한 결과를 빚어내게 하였다. 1908년 1월 24일과 26일에 의병들은 한성주변의 동막리와 창의문밖에서 일제와 치렬한 전투를 벌렸으며 많은 희생을 내였다. 한편 주력부대의 진격을 기다리고있던 허위의 선발대는 1월 29일 적과의 장기간의 격전끝에 퇴각하고말았다.
리린영은 한성공격작전이 실패한 후 충청북도 황간지방에 은신해있다가 체포되여 희생되였다.
리린영의병대의 한성공격이 실패한 주되는 원인은 군사지식이 미약한 유생들이 의병대의 지휘를 맡고있은데 있었다. 13도창의대장으로 추천된 리린영이 부대의 큰 전투를 눈앞에 두고
나라와 민족이 당하는 고통보다 자기 가정의 불행을 더 중시한 리린영의 행동은 참된 효자의 표본이 아니였다. 리린영이 만일 13도창의대장으로서의 자기 책임을 다하여 목적을 성취한 다음
리린영의병대의 한성공격전투가 비록 실패하였으나 그들의 투쟁은 우리 민족의 반일의병투쟁사에서 일정한 의의를 가지였다.
리린영의병대의 한성공격전투는 우리 나라를 완전히 강점하기 위해 발악하는 일제침략자들에게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주었으며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과 인민들을 반일투쟁에로 더욱 고무추동하는데서 주요한 계기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