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기계다리》-허죽산

 2021.11.24.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체육은 나라의 국력을 다지고 민족의 슬기와 존엄을 떨치는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허죽산은 주체13(1924)년 8월 25일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인 중국 길림성 룡정시 수남촌의 빈농가정에서 4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망국노의 처지에 빠져있던 암담한 그 시기 그의 부모들은 왜놈들의 등쌀에 못이겨 조상의 뼈가 묻힌 정든 고향인 함경북도 길주땅을 떠나 이국의 황량한 들판에 괴나리보짐을 풀어놓았다.

가난한 살림이였지만 부모들은 막내아들인 죽산이만은 소학교에 보냈다. 허죽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작이 재빨랐다. 그는 공부도 잘했지만 체육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있었다. 체육시간이 오면 허죽산은 남다른 열성을 가지고 참가하였는데 100m달리기에서는 늘 1등을 하였고 철봉, 평행봉운동에서도 힘든 기교동작들을 곧잘 수행하였다.

그러던 허죽산이를 축구인생의 길에 뛰여들게 한 하나의 계기가 생겼다. 어느날 허죽산은 동무들과 함께 룡정시내에 구경을 갔다가 일본놈아이들에게서 공도 찰줄 모르는 바보라는 모욕을 받고 꼭 공차는 기술을 익혀 일본놈아이들을 이기고야말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서슴없이 축구의 세계에 뛰여들었다.

허죽산의 축구공은 돼지오줌통에 바람을 넣고 만든 공이였으며 후에는 벼짚공으로 《발전》하였다. 가난한 속에서도 그의 부모들과 형들은 축구를 하고싶어하는 허죽산의 꿈을 성사시켜주기 위하여 성심성의를 다하였다.

후날 허죽산은 맏형을 따라 룡정시내로 이사가서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사립중학교인 동성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와 축구훈련에 전심하였다. 노력이 천재라고 땀을 많이 흘린 보람이 있어 그의 축구기술은 날이 다르게 발전하였으며 허죽산이 축구를 잘한다는 소문은 다른 학교, 다른 지방에까지 널리 퍼져갔다.

연길현에 있는 중학교들은 1년에 한번씩 체육경기대회를 열고 축구, 롱구, 배구, 륙상종목을 가지고 대항전을 벌리군 하였는데 이 대회의 축구경기에서 동성중학교팀은 일본학교 축구팀과의 결승경기에서 허죽산이 넣은 2개의 꼴로 상대방을 타승하고 1등을 쟁취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경기상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면서 탄력있는 육체와 빠른 속도, 재치있는 공다루기로 축구계를 놀래운 허죽산을 소개하는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축구감독들은 저저마다 허죽산을 찾아와 자기 팀으로 끌어당기려고 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왔다는 왜놈감독은 일본으로 건너가 선수생활을 하자고 하면서 일본에 가서 이름을 날리면 국제경기에도 참가할수 있으니 《앞길이 열린다》고 하였다. 허죽산은 왜놈감독을 쏘아보며 어찌 제 피줄을 버리고 일본사람이 되겠는가고 하면서 열백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추상같이 내쏘았다. 이 말 한마디에 그는 《불온분자》라는 딱지를 받고 룡정시로 쫓겨갔으며 집에 도착하니 벌써 징용장이 기다리고있었다.

징용장을 찢어버리고 항일유격대를 찾아 만주광야를 헤매던 허죽산은 종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왜놈들을 피하여 숨어살다가 길림성의 한 산간벽지에서 조국해방의 기쁜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조국으로 나갈 일을 의논하던 허죽산은 조국에서 자기를 데리러 사람이 왔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는 즉시 기차를 타고 조국으로 향하였다.

해방의 감격과 기쁨에 설레이던 조국은 허죽산을 뜨겁게 맞이하였다. 허죽산은 청진방직공장(당시) 공무직장에서 일하면서 우수한 축구선수들로 축구팀을 뭇고 그해 주체35(1946)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체육경기대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피타는 훈련으로 자기의 특기동작인 180°휘돌려차넣기, 공중공처리기술을 완성하였다.

그러던 10월 6일 허죽산을 비롯한 체육선수들은 해방의 은인,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전국체육인대회에 참가하였다. 해방된 조선의 체육이 나아갈 앞길을 휘황히 밝혀준 김일성장군님의 연설은 모든 대회참가자들의 심장에 력력히 아로새겨졌다.

허죽산은 이날의 감격을 가슴에 새기고 수많은 국내국제경기들에서 명성을 떨치고 《기계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주체38(1949)년 2월에 허죽산은 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민족보위성(당시)축구팀에 소속되여 그해에 진행된 국내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였으며 8월에는 마쟈르에서 열린 제2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우리 나라 축구종합팀선수로 참가하여 자기의 특기기술을 온 세계에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미제에 의하여 조국강산에 전쟁의 준엄한 시기가 닥쳐오자 허죽산은 남먼저 해군중위의 군복을 입고 전선으로 나갔다.

주체39(1950)년 9월 11일 그가 호송하던 군용차가 철령고개에 들어섰을 때 적들의 폭격기편대가 날아들었다.

허죽산은 경기관총으로 적기와 싸우다가 포탄상자를 씌운 방수포에 불이 달린것을 보고 그것을 벗기려는 순간 적기총탄에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26살의 젊은 나이에 《기계다리》로 명성높던 조선의 공격수 10번, 허죽산은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났다. 이 세상에 나라도 많고 축구명수도 적지 않지만 그토록 이름을 날리던 축구명수가 조국을 위한 성전에 목숨을 바친 실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죽산은 너무도 젊은 나이에 자기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절세위인들의 자애로운 사랑과 믿음속에서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원히 빛나게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허죽산이 우리 곁을 떠난 때로부터 40여년이 흘러간 어느날 새 조선의 축구명수였던 《기계다리》 허죽산에 대하여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전에 그가 《기계다리》로 불리웠다고, 지금은 그런 특기를 가진 선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허죽산의 이름을 거듭 외우시였다. 그러시면서 그후 허죽산의 자료까지 일일이 보아주시며 허죽산과 같은 특기있는 선수들을 많이 키워낼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동시대 체육인들과 축구애호가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던 《기계다리》 허죽산, 그는 바로 숭고한 도덕의리의 귀감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추억속에 다시금 살아 시대와 력사의 높은 언덕에 오르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