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안목으로 살수위치문제를 가장 명철하게 해명해주신
자기의 진면모를 잃고 력사에 그 빛을 잃었던 고구려의 력사를 우리 민족의 천년강국의 력사로 바로잡아주시고 빛내여주시기 위하여 로고를 바쳐오신
《고구려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조국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교양되고 무술을 배웠으며 용감성으로 단련되였기때문에 높은 민족적긍지와 씩씩한 기상을 지닐수 있었으며 아세아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수나라의 300만 대군의 침습을 물리치고 나라의 영예와 민족의 존엄을 지킬수 있었습니다.》 (
605년에 제애비 양견을 죽이고 통치자가 된 봉건중국의 수나라 양제는 612년 1월에 113만 3 800여명의 전투부대와 그 두배에 가까운 후방부대까지 합하여 모두 300만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또다시 고구려를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떨쳐나선 전체 고구려군민들의 투쟁에 의하여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대승리를 이룩하여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내고 또다시 조선민족의 슬기와 용맹을 떨치였으며 수나라는 대참패를 당하고 괴멸의 위기에 빠지게 되였다. 하여 고구려인민들은 국토를 지켜내고 동방강국으로서의 나라의 위력을 널리 떨치였다.
이 전쟁에서 수나라침략자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주고 고구려가 결정적승리를 이룩하게 하는데서 의의가 가장 큰 전투가 바로 살수전투였다.
원래 수양제는 대병력으로 단숨에 고구려를 먹어보려는 심산밑에 이 전쟁을 발발하였으나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과 튼튼한 방어에 부딪쳐 초기의 침략적야욕을 달성할수 없었다.
막대한 희생을 내면서 가까스로 료하계선을 돌파한 수나라침략자들이 고구려의 서쪽관문이며 전략적요충지인 료동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지만 석달이 지나도록 점령하지 못하였으며 전선은 이곳에 고착되게 되였다. 수륙병진, 속전속결의 방법으로 고구려를 제압하려던 침략기도가 파탄되고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바빠맞은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비롯하여 9명을 우두머리로 하여 30만 5 000명으로 구성된 9군의 별동대를 압록수(오늘의 태자하하류)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로 진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애국명장 을지문덕은 적9군이 태자하하류로 침공하여오자 유인전술과 청야수성전술로써 적들을 피로약화시키고 굶주림에 허덕이게 하였다. 한편 패수(압록강하류)로 해서 기여든 적 수군은 저들의 9군이 도착하기 전에 4만명의 군사로써 서둘러 평양성(봉황성)을 공격하였으나 장수 고건무가 이끄는 용감한 고구려군민에 의하여 그 대부분이 소탕되였다. 고구려군의 유인전술과 청야수성전술에 걸려 겨우 평양성 30리밖에까지 이른 적9군은 저들의 수군이 이미 격파당하였을뿐아니라 평양성방어가 철벽이라는것을 알고는 전진을 계속할수 없었으며 그곳에서 우물거리다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군은 한편으로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다른편으로는 맹렬한 추격전을 벌리였다.
적들이 퇴각하여 살수가에 이르러 군사인원의 절반정도가 강을 건너갔을 때 강가에 이미 매복하고있던 고구려군대는 앞뒤에서 일제히 드센 타격을 가하여 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이 전투에서 수나라 9군은 거의다 전멸되였는데 살아돌아간 자는 겨우 2 700명밖에 되지 않았다.
력사에서는 이 전투에서의 고구려의 빛나는 승리를 가리켜 《살수대첩》이라고 부르고있다.
살수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한것으로 하여 수양제는 더는 고구려와 전쟁을 할수 없었으며 이튿날에는 침략군에 총퇴각을 명령하지 않을수 없었다.
살수대첩은 고구려군민의 애국적인 투쟁과 을지문덕을 비롯한 애국명장들의 능숙한 지휘에 의하여 마련된것으로서 그것은 중세 우리 인민의 반침략투쟁사에서 빛나는 장을 장식하였다.
이와 같이 살수전투는 612년 고구려-수전쟁에서 고구려의 승리를 결정짓게 한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전투였다.
그런데 지난날 대국주의사가들은 612년 고구려-수전쟁의 종말을 결정짓는 전투가 벌어졌던 살수의 위치를 오늘날 우리 나라의 청천강으로 외곡단정해놓는 행위를 감행하였다. 한편 사대주의에 물젖은 김부식을 비롯한 사대주의사가들도 대국주의사가들의 이러한 론조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오랜 력사적기간 살수위치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정설로 되여왔다.
살수위치에 대한 대국주의사가들과 사대주의사가들의 외곡날조행위는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이름떨친 고구려의 력사적지위를 깎아내리려는것으로써 절대로 용납될수 없다.
하지만 1960년대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력사학계에서는 살수위치를 청천강으로 보는 종래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살수위치를 청천강으로 외곡단정해놓은 대국주의사가들과 사대주의사가들의 고구려력사외곡책동의 교활한 목적을 간파하시고 그것을 주체적관점에서 바로 해명해주신분은 우리
당시 전체 군민이 상무정신으로 무장되여있었고 애국심에 불탔으며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있던 고구려에 있어서 침략군이 300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대군일지라로 큰 문제로 되지 않았다.
고구려인민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다가도 쉴참이면 말타기와 활쏘기, 창쓰기와 칼쓰기 등 군사경기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체력과 군사적준비를 튼튼히 갖추어나갔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무술에 능하고 지혜가 뛰여난 사람에 대하여서는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나라의 인재로 등용하는 제도가 실시되여 온 나라에 상무정신이 나래치고 누구나 다 외래침략자들을 쳐물리치는 전장에 나가 전공을 세우는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의무로 간주되여왔다.
그런것만큼 수나라군대가 강대한 고구려의 국경선인 료하류역을 넘어와 견고한 방어요새들이 조밀하게 배치되여있는 고구려의 광활한 지역을 순조로히 지나 종심깊이 오늘의 청천강까지 쳐들어왔다는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것이였다.
살수위치에 관한
살수위치가 정확히 해명됨으로써 수나라침략군대의 《위세》를 돋구고 고구려를 쇠약한 나라로 날조하여 중세동방의 강대국이였던 고구려의 위상을 깎아내리려던 대국주의자들과 사대주의사가들의 책동은 여지없이 분쇄되게 되였다.
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