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력사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과 전통도 잘 알아야 한다.》 (
슬기롭고 재능있는 우리 인민은 지나온 력사적행정에서 민족의 넋이 깃든 귀중한 유산을 끊임없이 창조하여왔다.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높이고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깊이 간직하는데서 우리 민족이 이룩한 귀중한 유산을 잘 아는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지난 시기 우리 민족이 이룩한 문화적유산가운데는 규장각도 있다. 규장각은 일명 내각, 리문원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은 한마디로 문서고이며 출판기구였다. 규장각은 1776년(정조 즉위년)에 력대왕들이 지은 글, 글씨, 그림, 유언, 비밀지시의 문서와 왕의 초상, 왕실족보, 도장을 비롯하여 국보적인 책, 경전, 여러 학자들의 저서를 정리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관청이였다.
물론 그 이전시기에도 규장각이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세조통치년간(1455년-1468년 8월)에 동지중추부사 량성지 등의 제의에 따라 어제(왕이 지은 글), 시문 등을 린지각의 동쪽별당에 봉안해두고 그곳을 규장각이라고 불렀으며 숙종통치년간(1674년-1720년 10월)에는 종정시에 작은 각을 세워두고 어제, 어서(왕의 글씨)를 봉안하였는데 거기에 규장각이라는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이때의 규장각은 다만 어제, 어서, 왕의 초상 등을 보관하는데 불과하였다. 또한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 몇명의 겸직관원이 있었을뿐이다. 아직은 하나의 완전한 관청으로서의 체모를 갖추지 못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이르러 국왕이 대신들을 불러다 《선대 왕들의 구름같고 보배로운 필적은 모두 교지, 조서이다. 나에게 준 그 글들은 공경하고 삼가하여야 할것이기때문에 어찌 심상하게 생각하고 간단히 여길것들이겠는가. 마땅히 하나의 각을 세워서 력대조정의 어필(왕의 필적), 어제를 봉안해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창덕궁의 북쪽동산에 각을 세우도록 하였다.
1776년 3월에 시작하여 7월에 이르러 공사가 끝났다. 그리하여 규장각이 세워지고 규장각신하 6명과 그 아래 필요한 임원이 제정되였으며 규장각의 운영절목이 작성되고 그 운영질서와 체계가 확립됨으로써 규장각은 자기의 독자걱인 사명과 임무를 지닌 하나의 관청으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규장각은 단순히 어제, 어서, 초상 등만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국보적인 책, 경전, 여러 학자들의 저서 등을 수집, 보관, 출판인쇄하는 관청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였다.
1782년(정조6년)에는 전문 서적간행을 맡아보던 교서관이 규장각에 소속되였으며 규장각을 내각이라함에 견주어 교서관을 외각이라 하고 규장각의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이 교서관의 우두머리 벼슬인 판교, 교리, 겸교리 등의 직제를 겸임하면서 교서관의 일을 주관하였다. 이리하여 규장각은 지난 시기 우리 민족이 이룩한 문헌유산들을 보관하는 서고로서의 사명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력사, 의학, 외교, 법전, 군사, 사전 등 각 부문의 서적을 편찬하고 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출판간행, 보관하는 우리 나라 도서출판 및 보관사업의 중심기지로 되였다.
제학 서명응의 《규장각강의서》에 이르기를 《우리 왕(정조) 즉위초에 우선 규장각을 세우고 규장각신하 6명을 두었는데 그 직무는 대궐의 글월과 도서를 받드는것이였고 그들이 하는 일은 어떤 문제를 론하고 시를 읊으며 인재양성에 이바지하는것이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어떤 문제를 론한다는것은 사회정치적문제를 론한다는것을 의미한다. 규장각에 속한 학자들은 시종신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 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과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행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규장각은 점차로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존재로 부각되였으며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차적으로 획득하면서 봉건정권의 핵심적기구로 변모되여갔다. 그리하여 신하들가운데서 규장각페지까지 주장하게 되였다.
규장각에 보관된 장서들은 봉건왕과 관료들의 독점물이였으며 출판간행물은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봉건관료학자들이 남긴 저서들뿐이였다.
근로인민대중은 활자주조를 비롯하여 출판과 관련한 여러가지 로동에 종사하면서 슬기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나 여러 서적에 대하여 향유할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는 우리 민족의 풍부한 민족고전문헌유산들은 규장각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규장각과 같은 서적편찬, 출판인쇄 및 보관기관이 있어 지난 시기 우리 민족이 이룩한 민족고전문헌들이 민족의 유산으로 전해질수 있었다.
오늘
참으로 지난 시기 규장각을 가지고있은것은 우리 민족의 더없는 자랑으로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