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에게 매혹된 인민은 언제나 위인을 칭송하는 전설들을 창조하는 법이다.
《
이 세상에 문자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향과 념원을 신기한 자연현상이나 특이한 생활세태에 담아 환상적으로 묘사한 가지가지의 전설들을 창조하며 살아왔다.
전설은 인민들속에서 창조되여 전해져내려오는 구전문학의 한 형태이다.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나라에는 인민의 슬기와 재능, 기지가 넘치는 전설들이 수많이 창조되여 전해내려오고있다.
오늘날 인민의 명승지로 꾸려진 박연에도 개성의 자랑인 박연폭포와 황진이에 대한 전설을 비롯하여 수십개의 전설들이 전해지고있으며 로동당시대에 와서 뜨거운 인간사랑의 전설까지 전해져 그곳은 더욱 유명한 명소로 되였다.
박연은 개성의 북쪽에 위치하고있는데 거기에는 예로부터 손꼽히는 명승지로 알려진 3대명폭포의 하나인 박연폭포가 있다.
주체81(1992)년 5월 오랜 력사의 도시 개성을 찾으신
동행한 일군들은 80고령의 년로하신 몸으로 한낮의 땡볕을 받으시며 성균관(당시)과 왕건왕릉, 경사급한 만월대의 옛터전까지 돌아보신
안내자로 함께 온 력사학자로부터 옛날 박진사가 달밤의 경치에 취하여 련못가에서 피리를 부니 불현듯 아름다운 녀인이 물속에서 나와 그 피리소리를 들었다는 유래로부터 박연폭포로 불리운다는 옛 전설을 흥미있게 들으신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 三千尺)
의사은하 락구천(依似銀霞 落九天)
(물줄기 날아서 삼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듯)
《이 글씨는 조선봉건왕조중엽의 녀류시인이였던 황진이가 폭포수에 머리칼을 잠그었다가 그 젖은 머리채를 휘저어서 쓴 시구라고 전해오고있습니다.》
개성이 자랑하는 황진이는 당대사회에서는 한갖 천한 기생이였다. 하지만 학문과 문장으로 견주면 감히 사대부들까지도 머리를 숙이는 시재였고 거기에 인물 또한 절색이였다.
그는 비록 기적(기생명부)에 오른 몸이여도 마음이 결곡하고 백설같이 깨끗하였으니 사람들은 그가 쓴 시를 한장 얻으면 가보처럼 귀히 여기군 하였다.
황진이가 가장 사랑하는것은 자기가 나서자란 개성이였으니 그중에서도 박연폭포야말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경이여서 날마다 시를 썼다.
어느날 송도장안의 제노라하는 량반선비들이 모여 《비류직하 삼천척 /의사은하 락구천》이라는 옛 시인이 쓴 시구를 바위에 새겨 기념하기로 하고 서로 주변의 아름다운 풍치와 시의 뜻에 어울리는 글씨를 고르기 시작하였다.
저마끔 있는 재간을 다 내여 한동이나 되게 갈아놓았던 먹물이 거의 밑창이 날 정도로 글을 써보았으나 신통한 글씨가 나오지 않아 맥을 놓고 멍하니 폭포만 바라보고있을 때 황진이가 나섰다.
황진이는 폭포수의 맑은 물에 머리를 잠그고 머리채를 붓끝인양 바위우에 휘저어 시구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그것을 폭포수에 왔던 석공이 제꺽 정으로 쪼아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힘과 느낌을 그대로 전하고있으며 그때부터 이름없던 너럭바위는 《글씨바위》로 불리우게 되였다.
송도의 자랑인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들어주신
그로부터 2년후 하늘땅이 무너지는듯한 크나큰 비애가 개성땅을 눈물의 바다로 잠그었다.
천림산과 성거산사이에 있는 박연폭포는 원래 사시절 큰비가 쏟아지건 나무잎이 떨어져 산을 뒤덮건 언제나 조금도 흐리지 않고 늘 맑은물만 떨구었다.
그러나
그리고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내는 이상한 현상은 황진이의 묘소에서도 일어났다.
지금까지 황진이의 봉분에는 푸른 잔디만 있었을뿐이였는데 1994년 그해 여름의 어느날에는 백설같이 흰 꽃송이들이 하얗게 덮이였다.
이 신기한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민족의
이 특이한 자연현상들은